(드라마) 하얀거탑
ㅇ 하얀거탑에 꽂히다.
- 무진장 재밌게 봤던 ‘하얀거탑’이 끝났다. (종영후, 인터넷 다운받아 다시 보는 등 폐인 짓을 기어이 했다) 시청률는 그다지 높지 않지만,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 연출자 안판석 PD는 “사내 권력투쟁과 술수를 깊히 공감하는 화이트칼라 남성들과, ‘남자들이 각잡고, 충성하는’것에 매료되는 계층들이 뜨겁게 호응한 듯”이라 말했는데, 맞는 말 같다. 나는 그 두가지에 전부 열광했다.
ㅇ 치밀한 디테일을 통한 공감의 힘
- 사실, 하얀거탑을 정통 의료드라마로 보긴 어렵다. 의학에 대한 열정과 휴머니즘, 환자과의 갈등과 신뢰,,, 같은 것은 양념일 뿐, 한 인간이 화려한 재능을 통해 적나라하게 추구하는 욕망과 권력에 대한 이야기다.
- 그렇게 앞만 보고, 뛰는 사람이 있는 공간이 병원이든, 국회든, 재계든, 역시 권력과 정치에 대한 드라마가 될 것이다. 사무실내 크고 작은 헤게모니 제압을 위한 살벌하거나 사소한 공작들, ‘뼈가 있는’ 수준부터 ‘치명적인’ 언어공격,,, 공감과 감정이입 만빵이었다. 그걸 가능하게 한 것은 치밀한 상황설정과 대사 들이 아니었나 싶다.
- 요새 드라마들의 너무도 당연한 구도들,, 출생의 비밀, 재벌가 2~3세들의 야망과 사랑, 화려한 소비, 귀족적 언행, 3~4각 애정관계등 뻔한 드라마 풍토에, ‘의학계의 권력과 출세질주기’라는 한가지 주제에 깊이 천착한 원작의 힘으로 통쾌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ㅇ 의학드라마!, 경찰드라마?
- 좀 먼 이야기지만, ‘24시간’, ‘프리즌 브레이크’ 등으로 번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미국드라마도 1990년대 중반까지 ‘비슷비슷한 로맨틱 코메디의 반복’라는 질타를 받으며 쇠퇴하다가 그 쇠퇴기를 중흥한 2개의 전문드라마- 의료물 ‘ER'과, 형사물 ’N.Y.P.D BLUES'를 통해 극복했다고 한다.
- 전문 분야, 게다가 생명과 연관된 긴급상황에 대한 치밀한 상황극은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
ㅇ 재밌는 형사물은 왜 없는걸까?
- 마침 의료드라마(하얀 거탑)가 끝난 시점에, 같은 MBC에서 형사물을 준비해 황금시간대에 방영한다. MBC의 HIT(?)!
- 히로인 고현정님께서 내가 근무하는 건물에서 촬영하는 것도 봤고, 언제 시작하나 기다리던 중이었는데, ‘야심찬 예고편’을 보고 미련없이 안보기로 했다.
- ‘여성 강력팀장과 담당 검사와의 연쇄살인사건을 둘러싼 갈등과 사랑’... 사건현장에 권총들고 출동한 검사님이 고현정팀장을 구출해내고,, 나원참,, 다 이렇다니깐,
ㅇ ‘매력있는 수사관’상을 만들지 못하는 사회
- ‘베스트셀러 소설, 이렇게 써라’의 저자, 딘쿤츠는 ‘주인공은 유능하고 매력있어야 한다’고 했다. .
- 인간적 허점이 있던, 악역이든, 주인공은 부정할 수 없는 재능을 전제로,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갖춘 매력이 있을때 시청자(독자)는 감정이입되고 선망한다. 그런데,,, 우리 형사물은 그런 관점에선 ‘안습’이다.
- 선망가능한 뽀대를 입히려면, 꼭 검사캐릭터(HIT, '박수칠 때 떠나라‘)혹은 ’사시 합격 경찰관‘(’특수수사일지‘에서의 소이현?)이라는 식으로 설정하고, 그렇다보니 번지르르해보이지만 내실이 없다. 왜? 그런 검사는 없으니깐, 취재가 안되고, 취재가 안되면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 창조에 실패한다.
- 그렇다고, 현실에 기반한 디테일을 그려내면서도 독자를 매료시키는 매력적 인물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 넓고도 깊은 지식, 소탈하면서도 고결한 성격, 범죄에 대한 증오, 수사에의 집념과 행동력, 찬란한 전략적 발상, 타인에 대한 배려와 타인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그런 주인공 수사관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쓰다보니 암담해진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그런 모든 걸 갖춘 사람은 없다.
- 다만, 내 좁고도 박약한 인간관계 속에서, ‘그럴 자질을 가졌던 분들’은 지금 대부분이 ‘수사현장’를 떠나, 기획, 정보, 경비, 교육분야 등으로 ‘칩거’해 버렸다. ‘노고와 권위가 일치하지 않는 속세, 풍진’을 떠난 것이다.
- 아직도 (처절히 인내하며) 남아계신 많은 분들에겐 죄송하나, 그런 현실을 생각하면 서글플 따름이다. 난 그래서 ‘수사현장에서 검사의 활약’을 다루는 어떤 대중물도 보지 않는다.
ㅇ 뱀발 하나-포기하지 못하는 자의 파국
- 얼마전, 고려사에 대한 에세이를 보니,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에 극구 반대했던 권문세가는 잠시 기득권을 지키는데 성공했지만, 그 기득권 향유로 초래된 근본적 천지개벽은 막지못하고,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가 주도한 조선 건국에 패배하여 목숨조차 부지하지 못했다는 글을 인상깊게 봤다.
- 05년부터 계속된 각종 검찰개혁에 대한 많은 요구에 검찰은 정말 발가락만큼도 양보하지 않고 있다.지금의 수사구조, 사법제도는 개인적으론 유능하고 고결한 검사들에게도 치명적이다. 스스로 절제하기 어렵거나, 조직적 타락에 유혹되고 굴종하기 쉬운 환경이다.
- 요새 언론엔 옛날 ‘부패경찰’들이 차지하던 위치와 지면을 ‘검찰의 수사의혹’들이 심심치 않게 게재되고 있다. 언젠가 고려말 권문세가가 걸을 수 밖에 없는 파국을 그들이 겪지 않을까, 우려되고 걱정된다.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서 겪을 사회적 지출이 엄청날 것이기 때문이다.
ㅇ 뱀발 둘
- 위와 같은 많은 상념에도 불구, 오늘도 나의, 우리의, 경찰의 실수도 여전하다는 생각에 사실, 부끄럽고 민망하다. 내가 생각해도, 이런 류의 글쓴기는 결국 남탓이기 때문이다.(아무리 지금은 나의, 우리의 부족함의 근본적 원인이 잘못된 제도라는 '남탓'이긴 하더라도).
- 근본적인 ‘남탓’은 어쩔 수 없지만, 오늘의 ‘내탓’도 꽤 하고 살아야겠다. 나나 잘하자. (아, 하얀거탑 시즌2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