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대한 만화 이야기
어제는 음식-요리 만화에 대한 추억과 소감을 써봤으니, 오늘은 '술'에 대한 얘기를 써보련다.
당분간, 강제 금주(치과 치료)하는 와중에, 상상으로나마 누려야지.
이야기도 아름답거니와 여기 이 술을 마시고 싶다. <명가의 술>
<나츠코의 술>이 일본원제인데, 국내에는 <명가의 술>로 번역되기도 했다.
나츠코는 술에 대한 천부적인 미각과 감성(그리고 막강한 주량까지)을 갖추고 있다. 술도가의 딸이지만, 도시로 나와 카피라이터로 살고 있다.
술도가를 이은 오빠가 요절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오빠가 도전했던, '전설의 쌀'로 담근 '전설의 술'을 되살려는 이야기이다.
일본주(사케)에 대한 문화를 음미하게 해주고, '전설의 쌀'을 키워나가는 과정부터 '술을 담구는' 도전과정이 흥미 진진하다.
우여곡절 끝에 마을 전체를 조금씩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시행착오를 거치다가 기어이, '환상의 술'을 복원하는 과정은 짜릿하고 즐거운 이야기로서 쾌감을 준다. 하지만, 술을 다루는 만화로서 감사한 점은, 중간 중간 나오는 맛있는 술에 대한 묘사들이 참으로 기품있게 맛깔스럽다는 것이다.
실제 사케는 '나쁘진 않지만, 이게 그리 맛있나?' 싶기도 하고, (비싸기도 하고 ㅎ), 도수는 낮아서 '술'로서 짜릿함이 없어, 다소 무덤덤한데,
이 만화의 묘사는 어찌나 맛있어 보이는지, 보고나면, '청하'라도 사서 마시기 일수이다.
예쁘고 현란하지만, 마시고 싶은 마음은 그냥 그런;;; <신의 물방울>
와인 학습만화로서 명성이 자자하다. <신의 물방울>로 배우는 CEO 와인 강의 같은 것이 있다니, 이 만화의 성격을 참 그럴 수 없이 잘 보여준달까?
주인공들의 외모는 출중하며, 이야기는 매끈하다. 대결구조도 전형적이다. (냉혹한 수재 노력가 VS 뭔가 어설프고 귀여운 천재)
와인을 설명하고, 와인을 보다 편하게 받아들이게끔 해주는 만화로서 훌륭하다. 그러니 여러 방면으로 재인용되고 인기를 끄는 것이겠지.
손발이 오글거리는 와인 시음 평론도, 만화 속 등장하는 현란한 묘사와 함께라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같다.
그러나, 술에 대한 만화는 결국 술을 마시고 싶어야 하지 않을까?
'음, 와인마시는 사람도 나름 나쁘지 않겠군' 정도 생각이 들게 해주지만, 이 만화를 보고서, '으악! 와인을 마시고 싶어'라고 생각되진 않는게 아쉽다.
분위기, 이야기, 저 술을 마시고픈 마음을 모두 잡았다. 내겐 1석3조 <바텐더>
앞선 <신의 물방울>이 그렇듯, <바텐더>도 일본만화 특유의 '덕후 기질'이 깃든 만화다.
위스키와 칵테일 등 각종 리큐르에 대한 소개들이 풍부하다. 하지만, 그게 '정보 전달'로만 느껴지지 않고, 그 에피소드 속에 잘 녹아있다.
'왜 이 사람에게 이 칵테일인가?'를 개연성있게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는 '바' 특유의 공간적 미학이 있다. 이 만화를 보며 왜 (전통적인) 칵테일바의 출입문이 아무런 장식도, 유리문도 없이, 두꺼운 문으로만 된 것인지 알게 되었다. 혼자 한잔의 술을 마시기 위해 바를 찾는 사람들은 그만큼 '비밀'과 '고요'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또 이율배반적인 것이, 그렇게 택한 '고독'과 '비밀'의 공간에서, '나만을 위한 한잔의 술'을 만들어 주는 바텐더에겐 조심 스레 내 얘기를 하고픈 기분이 드는 것이다.
바텐더 이야기는 그런 Bar에서 바텐더가 만나는 사람들과 한 잔 술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만화를 읽고 마시고 싶었던 술들, 역시 많았다.
막걸리 소재로 잘 뽑은 이야기 한편 <대작>
할머니의 전통 막걸리를 부활시키려는 천방지축 손자와 그런 노하우만 빼앗으려고 핍박하는 대형 술도가의 이야기
후련하게 마시는 막걸리의 느낌을 잘 살린 씬들이 몇 있지만, 갈등의 축이 일직선이고, 소재가 되는 술이 '막걸리' 한 종류라서,
엄밀히 말하면, '술에 대한 만화'라고 보기는 아쉬웠다.
술에 대한 만화는 이래야지 싶었는데, 급 종결? <술,술,술>
맨처음에 어느 잡지에선가? 만화 진열대에선가, 1편을 보며 아주 기대가 되었다.
(주로 일본 만화에서 전형적으로 구성된) 술에 대한 만화가 가져야 할, 여러 미덕을 풍성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존재하는 술들에 대한 맛깔난 묘사, 잘 모르는 술들에 대한 지식들, 그리고 다양한 인물들의 묘사, 이야기 구조 등등
재미있었다. 뭔가 비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술에 대한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주인공과 그런 주인공의 파트너가 된, '술에 대해 초보'이지만,
타고난 미각을 가지고 있는 여류 작가, 이런 조합은 너무 당연해서 실패하지 않는 법이다.
다채로운 이야기, 갈등, 술들의 소개들이 좋았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갑자기 끊겨버렸다. 아쉬웠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술에 대한 만화가 아쉬운 것은, 지당하게 두 가지 원인 때문일 것이다.
첫째는 좋은 이야기를 길게 끌어가기엔 토양이 척박한 만화 출판계의 문제이고,
둘째는 많이 소실되어 버린 우리의 술문화 일 것이다.
호흡을 길게 가져갈 수 없으니, 차분한 취재가 되지 않고, 술문화가 한때 다 스러져서 이제 겨우 복원중이니 소재가 충분치 않을 것이다.
아쉽기 그지 없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의 술문화를 압축적으로 재구성한 <식객> 5권 술의 나라 편이 훌륭했다.
과하주, 청주, 동동주, 소주, 술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를 연작으로 그렸다.
주인공 성찬이 비를 피하면서 한잔 마시는, (술꾼들에겐 가장 좋은 소리 안주가 빗소리 아닌가?) '과하주'
최고의 술을 빚기 위한 집요한 노력을 묘사한 '청주 이야기'
스러져가는 막걸리 술도가의 실제 이야기를 모티브 삼은 '막걸리'이야기 (이 상표를 찾아 마셔보기도 했다. 맛은 다소 평범^^)
통쾌하게, 후련하게 마시는 동동주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결합한 '동동주편'
최고의 맛, 그러나 최악의 술주정을 준다는 '전설의' 소줏고리를 매개로 한, 전통 소주이야기(이 술이 제일 먹고 싶었다)
우리의 아쉬운 술문화를 허영만 선생님의 탁월한 구성력으로 재탄생시킨 아름다운 이야기들이었다.
아 그러나 역시 술의 종류, 문화가 더 깊고 넓었으면 좋겠다.
그런 측면에서 대체 마셔도 마셔도 끝이 없는 <술 한잔, 인생 한모금>
이야기가 별로 없다. 오로지 마시는 이야기,
어찌 말하면, '술에 대한 만화'라고 보기도 애매하다.
그냥 한편 한편, 각종 술을 마시는 그림책에 몇문장의 술에 대한 헌시를 붙인 일본 전통 민화 비스무리 하다.
그런데 그렇게 각종 술에 대한 한편 한편 헌시를 소개한 것이 어느덧 벌써 서른 권이 넘어간다.
대체 얼마나 더 마실 수 있는 것이냐? 이 만화는??
아냐, 괜찮아. 그냥 즐겁게 마시면 되지 <술꾼도시여자들>
술에 대한 이야기를 웹툰에서 그것도 차도녀들과 같이 볼줄은 정말 몰랐다.
그것도 이렇게나 히트라니?
지금껏, 풀어놓은 술에 대한 만화는 그 주인공이 '술'이라면, '술도녀'의 주인공은,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술의 종류, 묘사, 설명, 지식, 별로 쓸데 없다. 얼마나 시시껄렁, 낄낄하하, 벌컥벌컥 마셨는지의 반복반복반복뿐
그러나 그게 재밌는 삶, 술과 함께 한 생활 아니겠나? 술에 대한 문화와 품격을 곧이 따지지 않더라도, 요샌 이 술도녀가 내겐 제일 재밌고, 그날의 술맛을 댕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