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보며 느낀 점

1Q84 ; 자유의 추구 -진리 / 고독/ 차가움과 뜨거움

미리해치 2012. 9. 8. 13:28


(아마 여자 주인공 - 아오다메?)


0. 이 길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굳이 글로 소감을 남겨야 할까?  

느낌을 솜사탕같은 몽실한 감촉으로 간직하는 것도 좋았으리라,,, 하지만, 그 솜사탕도 언젠가 녹아 사라지고 맛조차 기억나지 않을까봐 솜사탕을 조금씩 뜯어 설탕물로 글씨를 써보듯 어설픈 감상을 거칠게 메모해본다.


1. 나비가 내꿈을 꾸는가?  몽환은 필요한 장치이자, 이미 현실이었구나

실은 하루키의 소설 중 <상실의 시대(노르웨이 의 숲)>,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같은 비교적 초기작(?)은 내게 달고 쓴 감흥을 주었다.  하지만, <양을 쫓는 사나이> <댄스 댄스 댄스> <태엽감는 새>등으로 갈수록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몽환적 분위기가 잘 납득이 되지 않고 스토리을 쫓는데 집중하지 못하게 했다

(대체 이 뜬구름 잡는 분위기들은 뭐란 말인가? 라는 어리둥절함)


그런데, '1Q84'에선 알 것 같다.  몽환/비현실과 경게/미스테리/초월적존재/풀리지 않는 수수께기는 작가가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장치였던 것은 물론, 그것이 오히려 현실을 나타내는 리얼한 묘사였구나 


(이렇게 납득한 것은 이 작품이 전작들에 비해서, 훨씬 친절했기 때문이다 - 분량도 많고, 2명~3명의 주인공들을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중첩 설명함으로써 충분히 정보를 제공하고 자연스럽게 설득되게 하는 것들)


2. 소설 읽기의 불편함, 그러나 감당해야 하는 불편. 

원로 문학교수님께서 말씀하셨더랬다.  '당신들 소설 왜 읽습니까?  그건 삶 속에서 당신의 좌표를 확인하기 위한 거요'


그랬네,, 사실 인문계열의 독서야 문(文), 사(史), 철(哲)일진데, 난 유독 문학에 대해서는 책에 손이 잘 안가는 편이다.

 철학이야 이젠 세분화한 각종 사회과학을 일컫는다보고(법/행정/경영/심리에 관해서는 필요시 조금 읽으니), 역사는 비교적 좋아하는 분야, 자주 읽는데, 이런 독서는 나를 덜 불편하게 한다.  


왜냐면, 철학과 역사는,, 삶의 먼 풍경을 망원경으로 멀리서 넓게 조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설은 그 단면을 현미경으로 보게끔 한다.  그 추하고 슬픈것은 물론, 선하고 아름다운 것도 자세히 보면 불편해 뵈는 법이다.  그러나, 이 소설 속 불편함은, 그것이 '진실에 가깝기에'(허구일망정 본질은) 감당해야 함을 알겠다


 

3.  비현실과의 교차, 2개의 달이 오히려 삶의 진실일수도

 하루끼의 전작들보다는 친절하다곤 해도, <1Q84> 역시 수수께끼로 가득찬 환상 소설의 범주에 들 것이다.  

그러나 반문해보면, 우릴 둘러싼 현실이라는 것이 과연 얼마나 단단한 진리/작동규칙에 발을 대고 있는 것인가?

시간의 흐름, 우주의 생멸과 작동과 같은 자연과학의 미지영역도 그렇다치고, 우리의 삶의 지배규칙도 과연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 정보가 입수되는 것, 규칙이 정해지는 과정/정당함 등이 우리가 '아는 것', '믿는 것'대로 운용되고 있나?

음모론를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권력/정보를 쥔 자들이 '이렇게 믿어라' 하는대로 너무 쉽게 속아주는(속지 않으려는 노력을 포기한) 세상이 아니던가?

'자유'와 '선택'이라는 단어가 보편화되었지만, 시야가 미치는 범위의 삶들 또한 그지 없이 '보편타당' 또는 '천편일률', 혹은 '지리멸렬'해지고 있다.

'평범'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 하며, 평범을 자의로 벗어나거나 타의로 박탈된 사람들을 백안시함으로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아오다메, 덴고, 우시키와 는 계속 겪어왔던 부조리)

그런 <'평범(으로 알려진)'에로의 속박>, <상식(이라 강요된) 것의 감옥> 속에 스스로 가둔 우리들이 사실은 내가 보지 않았던, 보려고 하지 않는 '달이 2개'라는 것을 알게 뭔가?  떠 있어도 안보고, 보고도 외면하며, 스스로의 눈을 속여버릴텐데, 



4. 자유를 추구하는 차가움, 외로움, 치열함


평범하지 못한 주인공(덴고-아버지의 직업 / 아오다메-부모의 종교 / 우시키와-못생긴 외모)들은 고통받는다. 

그러나, 본질이 아닌 흠결에 좌절하지 않겠다고 스스로를 인정한 순간, 주체적인 삶의 자유를 추구하는 외롭고 차가운 길을 걷게 된다.

사회적 관습은 물론, 결혼/안정된 직장 / 형식적인 인간관계 등  세상의 관례와  애매하게 타협하지 않고 거리를 둔다

그것은 부적응을 넘어서 주체적인 결정과 각오가 전제된 원칙이다.  그들은 외롭고 차갑지만, 삶의 본질에 닿고 싶어하는 자유인들이다  ('나는 1Q84의 세계에 우연히 휩쓸린 것이 아니다.  내가 필요해서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다'는 깨달음 역시)


규격에 맞게끔, 세상이 요구하는 그저 그런, 공산품 삶에 박히지 않고, 내가 믿고, 내가 지켜가고픈 삶의 원칙을 추구하는 것.  내가 찾고자 하는 세상의 진실을 찾는 것은 고독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유를 찾아가는 길이다



5. 굴종하지 않는 자존, 역설성의 후련함



주인공들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부조리, 불평등을 수동적으로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성과 신체능력 등 탁월한 능력으로 돌파한다.  

한편 역설적이게도 남자주인공 덴노는 '지성(수학자이자 소설가)'에 의지하고, 여자주인공 아오다메는 '육체의 힘'(격투기, 살인기술)'이 모티브가 된다.  

한편 또 주요한 등장인물 '노부인'은 막강한 재력/권력자이면서도 폭력피해자 여성들을 위해 복수해주는 '공격적 전능'을 발휘하고, '노부인의 출실한 경호원' 다마루는 경호/살인/격투 등 육체적 프로페셔널이지만 '게이'이다.  

아오다메는 '죽어마땅한 남자'들을 암살하고는 그때마다 짧은 하룻밤의 남성을 물색해 성욕을 해소한다.  


이런 뒤섞인 아이러니는 천편일률적 관념에 대한 냉소이며, 읽는 이에게 후련함을 주는 역설이다.

<1Q84>가 하루키의 전작에 비해 여성 독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6. 차가워도 차갑지 않더라도 신은 이곳에 있다 / 천즉불인(天卽不仁)  - 세상의 균형


(못생겨서 싫었지만 나중엔 안쓰러워졌던 우시키와 의 표지?)

<1Q84>의 세상을 지배하는 진리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이야기 속 초월적 존재인 리틀피플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균형자 이며, 또 한명의 차가운 자유인 '다마루'역시, 칼융이 남긴 말 "차가워도, 차갑지 않더라도, 신은 이곳에 있다"는 말을 되뇌이며 사람을 죽인다.

절대적 악도 없다.  반드시 죽여야할 존재라고 알았던 종교집단의 '리더' 조차 자신에게 주어진 신적 운명에 억눌려 스러져가는 존재였다.   비호감의 전형일 뿐이던 우시키와는 추한 외모에서 비롯된 운명에 복명할 뿐이었다.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NHK 수금원은 자신이 해야 할 일, 잘하는 일이니 할 뿐이다.  


(한편, 하루키는 어느 작품에서는 '프로페셔널'에게 경의를 표한다.  '숙련가'를 둘러싼 아우라, 좋은 브랜드의 옷, 구두를 상쾌하게 묘사한다.  프로의 간명한 말투-낭비없는 대화를 존중한다.  일본인의 직인-職人-존중일지도)

   

세상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것.  그 원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마찬가지이리라.  칼융의 '차갑던, 차갑지 않던, 존재하는 신'이란 말과 유사한 동양의 관념도 있다.  '하늘은 인자하지 않다 (천즉불인/天卽不仁)



7. <진실의 외로움  & 서로 의지하기> 간의 균형 잡기


(무라카미 하루키, 님도 이제 저같은 얼간 독자를 위해 따뜻하고 친절하게 서사해주시는 건가요?)


<1Q84>는 대체 어떤 세상인가?  모호한 단초들이 흩어져 있지만 냉확히 알수 없다.  

과연 <1Q84>는 1984년의 평행세계였던가?  목소리를 베푸는 자는 대체 어떤 존재인가?  공기번데기는 무엇을 잉태하나?  '도터'와 '마더'의 역할은 무엇인가?  모호하다.  하루키는 끝까지 여지를 남겨둔다 

하지만, 모호하면 어떠랴?  우릴 들러싼 현실세계도 모호함들이 넘쳐나는데...


다만, 하루키의 설정한 장치 중, '초현실적 느낌'의 초능력 소녀 후카에리와 남자주인공 덴고과의 몽환적 성교를 통해, 여주인공 아오다메가 임신한다는 설정은 '말이야 잘 안되지만' 웬지 맘에 들었다 (로맨스의 완성 측면에서)

하루키의 몇몇작품에서 '몽환적/이상적 느낌의 여주인공'(<상실의 시대>에서는 나오코, <국경의 남쪽,,>에서는 시마모토)을 추구하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곁을 지켜준 포근한 여성'(<상실>에서는 미도리, <국경,,>에서는 하지메)에게 돌아가는 걸로 결론내곤 했다.  

사랑이란 감정의 완성이야 뭐가 어찌되든 '완성'이라 말할수는 없더라도, 웬지 '이상 속 그녀'와 결국 헤어지는 것이 그때마다 안쓰러웠다


근데, 1Q84에서는 '너무나 아름다운 그녀'와도 맺어지지만, 그 성교가 연결되어 '첫사랑 그녀'와도 이어지는 단초가 된다는 것이 누구와도 이별하지 않는 것 같아 웬지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좀 거창하게 해석하면, '개체성의 극복', '손을 잡고 살아가기'로 발전된 것이 아닌가? 라는 느낌도 들었다

언제나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외롭다.  외로운 주인공 또는 주인공의 대체인격들은 '마른 우물'속에서 하늘을 홀로 보며 죽어간다.  그야말로 처절한 미학이다.

그런데 1Q84에서는 몽환과 비현실이 섞이다가 결국 남녀주인공이 손을 잡고 잉태한 아이와 가족의 형태로 결속하며 헤쳐나가가로 한다.  하루키의 주인공들로서는 의아할정도의 가정적 결론이지만, 아, 역시나 이쪽이 더 따뜻하다


7. 수수께끼를 받아들이되, 진실을 추구하는 것  - 그것이 자유인가?


(외로운 진실을 추구하는 주인공들의 태도는 '자유인의 본질'을 연상시킨다)


한편, 초현실적 몽환이 아니더라도, <1Q84>의 구석구석에는 설명되지 않은 암시들이 흩어져 있다.  

혹시 덴고의 친아버지는 '리더'가 아니었을지?  목이 졸려죽었다가 환생했다는 아다치 구미는 혹시 덴고의 친어머니가 아니었을지?  아니면 또 목이 졸려 죽은 '아유미'는 아니었을까?  NHK 수금원의 대학생 살인사건과 덴고의 아버지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루키는 그 설명도 인색하다.  (그럼에도 작중에는 '권총이 등장하면 발사되어야 한다'는 체호프의 말을 역설적으로 자주 인용한다)


아, 그러나, 독자들이야 어쩔  것인가?  풀리지 않은 암시, 수수께기는 그대로 놔둘 수밖에 

또다시 되뇌건만, 우리가 사는 삶은 굳이 파헤치지 않아서(혹은 외면해서) 그렇지 얼마나 수수께기와 또 부조리로 가득 차 있나?


그런 수수께기가 왜 존재하냐고 따져묻는 것이 오히려 게으른 태도이다.  끊입없이 찾아가는 것, 그 답이 원하는 형태가 아니라 하더라도 노력하는 것이 자유롭고자 노력하는 자의 숙명이다.


 덴노와 아오다메는 왜 그토록 춥고 외로웠는가?  

애매하게 타협하지 않고 삶의 원칙 / 진실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수동적으로 겪어야 할 운명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어느 순간 소명으로 인식했다 (외로운 진리의 추구)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가짜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자유의 획득).  하지만, 그것 역시 끝이라 단정할 수 없다.  그들의 추구는 여전히 계속되어야 한다.  (과연 탈출한 세계가 진짜 1984년일까?  덴노는 원고를 계속 씀으로서 세계를 완성해야 한다)


그렇기에 이 소설의 독후감을 추구해야 할 삶의 태도와 연결시켜 제목을 붙인다면, 내겐 '자유의 추구, - 진리 / 고독 / 차가움과 뜨거움 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