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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이야기-2 본문

읽고 보며 느낀 점

로마인이야기-2

미리해치 2010. 6. 8. 14:50

<로마인 이야기 개관(전편에 이어) - 7권 악명높은 황제들>

 

 1. 로마의 황제

 

로마의 '황제'는 오늘날 인식된, 국가와 국민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고, 신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채 자손대대로 이어지는 개념이 아니었다.

 

군통수권, 법안의 제출과 거부권, 내각구성과 인사, 운영, 징세와 지출 등 국정운영의 권한, '국가의 아버지'라는 호칭같은 권한과 권위를 '원로원과 민회(중기부터는 사실상 군대의 승인)'로부터 위임받은 자를 칭하게 된 것이며, 그래서 호칭자체도,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의 권능을 이어받은 자'라는 의미로 Augustus Kaisar~의 명칭을 칭호에 덧붙힌 자를 말하게 된 것이다.

 

(같은 시기, 동양권의 '황제'와는 태생과 성격이 출발선상에서부터 달랐던 것...)

 

그리하여, 그 권능을 하나씩 하나씩 획득한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들이 어떻게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여 완전히, '최고 통치권자'의 존재를 기정사실화하고, 정착시켜나가는가하는 과정은 황제 자신과 사회구성원들 사이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7권 '악명높은 황제들'은 그런 시행착오의 과정을 정치적 분쟁(무고한 자의 생명까지 빼앗는), 공동체의 신뢰 저하 등 큰 희생을 거치며 바닥까지 추락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2. 2대 황제 티베리우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리게된-의 뒤를 이은것은 조카뻘 티베리우스였다.  양아버지이자 1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사회 제2계급인 '기사계급'(경제인 그룹)이었던 것에 반해, 손꼽히는 귀족명문가의 자제였던 티베리우스는,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와 달리, '귀족-원로원'체제에 대해 동료의식을 강하게 느꼈으며, 따라서, 자신이 그들의 '위'에서 통치한다는 지위도 불편해했다.

 

처음 원로원에서 황제직위 수락 연설 때도, 원로원이 예전과 같은 국가운영의 책임을 수행해준다면, 자신은 황제직을 버릴수 있다고 까지 말한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오히려, '황제가 갖춰야할 책임'과 권위를 가볍게 생각한다는 비판과, 이젠 국가운영책임을 부담스러워하는 원로원들의 위선적 비난을 임기내내 받게 된다.

<2대 황제 티베리우스>

개인적으론 참 고단한 인생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성실하고 유능하지만, 동생 게르마니쿠스처럼 휘황하게 빛을 바라는 타입의 인재가 아니었고,

조용하고 치밀하게 자신의 목표를 달성해내는 스타일이었기에

오히려 자신과 비슷한 선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비교당하고 경원당했다.

 

유능했지만, 동료귀족이나 민중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다.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가 확대성장시켜놓은 로마의 안정을 위한 뒤치닥거리와 위기관리를

 끊임없이 고독하게 수행했다.

 

말년엔, 그간의 혹평에 복수라도 하듯, 석연치않은 정치적 보복의 칼을 휘두르다 죽었다.

 

 

 

티베리우스는 대단히 훌륭한 행정가였지만, 위선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성격때문에, 점점 대중과의 스킨쉽을 차단하고, 특히 말년엔 키프리섬에 은둔하며 대제국 로마를 원격통치한다.

 

아우구스투스 시절 시도한 게르만 전쟁의 방위선을 수정하여, 방어선을 확립하고, 아우구스투스의 많은 정책을 정착시키며, 국가재정을 탄탄하게 만드는 등, 향후 로마의 원수정 운영의 기반을 탄탄히 닦은 치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나친 '결벽주의'는, 국민과 귀족들로부터 '버려졌다'는 인식을 갖게 한체 다소 억울한 폄훼속에서 사망한다.

 

 

3. 3대 황제 칼리쿨라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은것은 조카인 칼리쿨라였다.  젊은 나이 등극한 칼리쿨라는 선제 티베리우스의 전철을 밟지 않고자, 검투극, 축제 등 오락이벤트를 벌이며, 스킨쉽과 지지를 확보하지만, 향응만 즐길 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재정을 파탄냈고, 여동생들과의 근친상간, 무고한 자의 처단 등 혼돈만 벌이다 결국 암살된다.

<3대 황제 칼리쿨라>

선제 티베리우스와 반대로, 민중이 사랑해줄 만반의 준비가 돼 있는 상태에서 등극했다. 

그러나 나라를 크게 말아먹었다.  네로가 로마사 최고의 악제로 정평나있지만,

이 책에서 볼땐 이 친구가 훨씬 심하다

 

 4.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칼리쿨라를 암살한 근위대가 황제로 추대한 것은 다시,, 칼리쿨라의 삼촌인 클라우디우스,

 

황제 계승은 꿈도 꾸지 않고, 조용히 역사연구에만 몰두하던 그지만, 황제취임 후엔, 칼리쿨라가 파탄난 재정을 확보하고, 당시 갈리아인에게 원로원문호를 개방하는 등, 바른 방향의 역사운영을 건실하게 했다.  이 시기 로마는 브리타니아(영국)까지 진출, 지배하에 둔다.

 

대중적 카리스마나 정치력은 없었는지, 그다지 인기있는 황제는 아니었다고 하며, 재혼한 처의 아들(네로)를 빨리 황제로 올려보내고픈 재혼처에게 독살당했다.

 

 

5. 5대 황제 네로

 

그리곤,,,그 유명한 네로,

악명만큼 나쁜 황제는 아니었다는 것이 시오노나나미의 평가다.  칼리쿨라만큼 국정을 방기하지도 않았고, 나름대로 소신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세네카, 코르불로 등 당대 최고의 문무관의 충성심을 의심, 자살명령을 내려 귀족, 군인집단을 적으로 돌렸으며, 로마대중의 취미에도 맞지 않은 그리스문영을 대거 도입시키며, 자신이 가수로 출연하는 등 '기이한 행동'으로 민중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어 지지도가 급락,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 자살한다.  

<5대 황제 네로>

이상한 황제이긴 했지만, '엄청난 악제'는 아니었던 듯 하다. 

외교적 감각까지 갖춘 명장 코르불로 등의 도움이었지만,

고질적인 가상적국 타르티아(페르시아의 후신)과의 긴장관계를 해소시켰고,

로마 대화재의 후속조치를 차질없이 수행하는 등 성실히 통치하기도 했다.

그리스 예술에 대한 지나친 심취와, 가수 데뷔 등 '또라이짓'으로 권위를 스스로 훼손하기도 했지만,

오늘날 네로에 대한 악평의 상당 부분은

네로가 로마 화재의 원인을 기독교도에게 돌려 기독교 탄압에 이용했다는 것이 결정적인 듯 하다.

 

 

6. 제정 초기 황제정에 대한 소감

 

과문하지만 시오노나나미의 글을 빌어, 제정 초기를 평가하자면, '건실하지만 인기없었던 정책가 황제'와 '화려하나 내실없는 쭉정이 황제'의 반복인 셈이다.  공동체의 운영은 그런 작용-반작용이 오가는 듯 하다.

 

로마역사가 몸젠이, '로마를 반석위에 올려놓은 황제'로 평가했고, 원성 속에서 죽을 때까지 지배력을 잃지 않았던, 2대 황제 티베리우스를 제외하고는, 3~5대 황제는 모두 암살되거나, 자살을 강요(네로)당한다. 

 

왕조라는 것이, 투표 등을 통한 제도적 정권교체가 아닌 이상, 폭력적 수단을 이용한 권력의 교체는 당시 사람들의 택군(擇君)의 일환이었다고 변명할만한 소지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많은 혼동을 야기하는가는 따질 필요도 없이 자명한 것이요,  따라서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정말 인류가 악전고투끝에 손에 넣어, 귀하게 활용하고 있는 자산인가를 새삼 느끼게 해준다.

 

이어지는 <8권, 위기와 극복>은 그러한 폭력적 수단에의 정권교체로 인해, 시대가 겪는 혼동상과, 로마인 특유의 뚝심으로 인해,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8권부터는 다음 기회에,,,,

 

 

ps. 로마인 이야기 다음 독후감을 바로 쓰지는 못할 것 같다.  요새 맘이 심난해, 기분을 전환하는 다른 이야기를 끄적거리고 싶다..(누가 보시는지도 모르겠지만,,ㅠ.ㅠ, 혹여 기다리실 분을 위한 안내T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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