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광호 : 스마트치안, 경찰데이터 A&R을 위한 공부와 연대

욕망의 제어, 자아의 확장, 삶의 방향 찾기-스캇펙의 '아직도 가야할 길'을 읽고, 본문

읽고 보며 느낀 점

욕망의 제어, 자아의 확장, 삶의 방향 찾기-스캇펙의 '아직도 가야할 길'을 읽고,

미리해치 2011. 5. 25. 14:53


1. 난 왜 이런 '허전함'에서 쉬 벗어나지 못하나


겉보긴 별 문제없이 살아가고 있지만, 가끔 외로움,억울함,화에 시달린다

일,인간관계,공부에 투입할 에너지를 그런 감정에 휘둘리며 소진한다.  다른 사람에게 나의 욕망을 내세워 상처를 입힌다.

이런 건 그저 '나만 바꾸면 되는' 쉬운 문제이면서도, '나를 정말 바꿔야 하는' 어려운 문제이다.


2. 욕망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

먹고 살기만 하면 되었던 시대는 지났기에, 그러나 다양한 제도(사회적 계층/자본의 배분/결혼으로 인한 애정관계의 제약/육아의 책임)에 얽여져 있기에 현대인은 다양한 욕망에 시달리고 결핍감을 갖는다.

 세속에서 멀어져 자신의 도(道)를 찾는 사람들도 있다.
 
 조용헌님의 '방외거사' 시리즈를 보면, 도시와 세속에서 멀어져 자신의 道를 찾는 이들이 나오는데, 그들중 한라산에 들어가 부처를 찾는 대각심 스님께서는 이를 심플하게 말씀하신다.  '요즘사람들 고기를 많이 먹어선지 음탕해져서 그래' 라고,,

(바로 이분,, 앞에서 어설픈 말로 간보려했다간 뼈도 못추린다는 제주의 명(名) 스님)


'나이먹는 건 조절할 줄 안다는 거다.  쓸데없는 소비를 최소화하고, 저항해라, 그리고 남은 욕망을 좇아라고 하는 이도 있다.

딴지일보의 필진 중 한 명은 나이먹음과 욕망에 대한 글을 개인 블로그에 자주 게재하는데 이 글들이 좋았다.  


(바로 이 분,, 바람여행자)
 
부분 부분 떼어쓰면, 이렇다..

"마흔 살 별거 아냐, 변한 건 없어, 나도 세상도", "인생 긴거야, 체력을 길러",
"나이 먹으면 이제 재능있음과 없음을 알게되니, 이거 허투루 보지마",  "마를 줄 모르는 에너지는 줄었더라도, 네 곁엔 이젠 사람이 있어, 도움받는 걸 구차히 여기지 마",
"신기한 건 포기가 된다는 거야, 멋진 차, 맛있는 음식,,, 포기할 건 깨끗히 포기해, 소비를 줄이면서 오히려 네 부족한 지갑을 털어먹으려는 세상에 저항하라구,,"
 "그렇게 포기를 잘 해내고, 하고 싶은 걸 잘 골라서 즐겨, 이제 내가 관리할 수 있는 관록이 생겼고, 그 균형을 맞추면, 현명하게 40세를 즐길수 있을거야"


난 이 사람의 말도 좋았다.  웬지 위로가 되는 것 같아서,,

하지만 잠시의 위로, 잠시의 낙관일뿐, 삶 속에서 무수히 발생하는 욕망과 갈등, 사소한 낙망과 그로 인해 다시 격발되는 허무는 쉬 해결되지 않았다

그럴 때 읽게 된 한 권의 책....


3. 스캇펙의 <아직도 가야할 길> 


미국의 저명한 정신심리학자이자 기독교 목회자로도 활동했던 스캇펙 박사의 책이다.  성경 못지않게 많이 번역되어 팔렸다

책의 요지는 간명하다.  

고통을 피하려 하지 마라, 원래 삶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삶은 고해-苦海-다!)

겪어야 할 고통을 피하려 하신 시도-무책임한 시도에서 더 큰 고통이 생겨난다.

고통을 관리하기 위해 방법은 4가지다. ①즐거운 일을 뒤로 미루는 것 ②책임을 지는 것 ③진리에 대한 헌신 ④균형 잡기

이 속에서 우리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성장해 나갈 수 있다.  고통을 관리하는 것, 성장하는 것의 핵심은 바로 '사랑'이다.

뻔하다면 뻔한 말들을 많은 상담 치료 사례와 함께, 계속 반복해서 말한다.
그런 반복된 저자의 말을 계속 들으면서 마음 속에 진심으로 '고통을 피하지 말고, 즐거움을 미루며, 책임을 지는 인생, 그리고 그 안에 참의미의 사랑을 씨앗뿌리게 되는 느낌이다.


오랜만에 책에 밑줄지으며 메모하며 읽었다.  쉽게 요약하거나 단상을 정리하기 어렵다.  오히려 인상깊은 글귀나, 거기에 대한 내 감상을 메모한 것을 적어두는 것이 보다 충실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당신이 받고 있는 고통에 억울함을 토로하는 것은 의미없다.  넌 그것을 겪지 않을, 타파할 자유가 있다.  

그 자유-극복의 자유-가 있음에도 겪고 있는거라면 네가 그 자유를 포기한 것이니 거기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이 진실을 외면하면 결국 내 방임을 옹호하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해야 할 것이 있는데, 못한다. 안한다 난 약하다 하는 것이 오히려 오만한 태도이다.  나를 기만하는 것이니깐..

진리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단순하지는 않다.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나는 ~~다', '나는 ~~라고 생각한다'라는 낡은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나란 존재는 세상의 Filter이며 또 다른 이에게 세상을 비추는 것이다.  세상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세상을 알고, 또 다른 존재에게 세상을 전하는 것이다.  그럴려면 항상 내 자신의 자의식, 자기 욕망을 비워내려고 노력하고 세상을 제대로 알려는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진실에 헌신하는 것은 어렵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조직 내 관계에서 항상 진실을 견지하는 건, '절충'의 시도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절충의 한계는 - 거짓을 말하지는 말라(진실을 다 이야기하진 않더라도).  진실을 숨기는 것은 거짓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그 행위는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해서 내리는 결정이어야 한다.  

균형은 참으로 중요하다.  균형을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균형을 잃는 것은 더더욱 고통스럽다.  (정말 맞다. 인정한다)



4. 진정한 성장, 진정한 사랑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유일한 방법은 '성장'뿐이다.  그리고 '성장'을 위해선 '옛 자아'를 단숨에 포기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성장과 변화는 자아를 버리거나 묶어두는 (저자는 '괄호'라는 표현을 썼다) 행위로서 자의식, 선입견을 접어두고,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기법에서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사랑'이다.  

'성적인 욕구', '갖고 싶고, 접촉하고 싶고, 그 사람의 감정하나하나에 함께 동화하고 싶은 애착', '그 사람없으면 못사는, 또는 나 없이는 그 사람이 못사는 의존', '그 이를 위해 내 존재를 포기하는 희생',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 이런 것이 사랑?  아니, 이런 것은 사랑이 아니다.  


물론 성적 욕구, 애착, 의존, 희생, 느낌은 무의미한 건 아니다.  다만 이 단계를 거쳐 진정한 사랑에 이르지 못하면 썩거나, 퇴화해버린다.

진정한 사랑은 그이와 내가 함께 성숙함을 나눠갖고, 행동으로서, 노력하는 '견고하고 단단한 실천적 의지'다.

이런 진짜 사랑은 자아의 확장을 가능하게 한다.  내가 갖지 않아도, 내가 누리지 않아도 만족하게 된다.  사랑하는 이, 타인, 세상이 누리면 그걸로 진심으로 기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진정한 사랑에 들어가는 헌신, 책임의 에너지는 막대하다.  그러니 당신이 헌신할 수 있는 만큼, 책임질 수 있는 만큼 사랑해야 하며, 방종하지 마라 ('자유로운 사랑이란 이상이다. 불행히도 그 이상을 실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더 많이 더 오래 사랑할 수록 나는 커진다.  나를 비우고 다시 채우니깐.  이는 희생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성장을 위한 '이기적인 성장 과정'이다. 

사랑은 서로를 분리된 존재로 명확히 인식하며 또 서로를 정신 치료하는 것이다. 



5. 절대적 의지로의 합일

이쯤되면 책은 심리상담 / 자기 치유가 아니라, 거의 종교적 가르침의 색채를 띤다.  아닌게 아니라 주제는 그 쪽으로 넘어간다.

욕망으로 인한 고통, 감정에의 휘둘림, 의식 영역에서 상처 탓에 무의식적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 그래서 삶을 스스로 상처내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정신분열로 치닫는 것은 어떤 원인인가? 

왜 모두가 조금씩은 그런 문제가 있을지언정, 누군가는 상처로 터져버리고 누군가는 봉합시키는가?

상처입어 쓰러진 사람 중에 누군가는 계속 벗어나지 못하고, 또 누군가는 치유해내는가?  그런 '구원'을 받는가?

저자는 여기서부터 '절대자의 뜻', '숨겨진 의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구원은 단지 지금의 아픔을 이겨내는 것 뿐 아니라, 우리 삶의 목적과도 닿아있다고 말한다.  더욱 스스로 완전하게 하여 신의 뜻에 맞게 하는 것, 신의 대리자가 되는 것, 신의 뜻을 세상에 펼치는 것, 그것이 인간의 존재의의이자, 가야 할 길이라고,


6. 신의 개념에 대한 불편함과 이해

사실 '정신 분석, 심리 치료', '개인의 문제 극복', '욕망의 관리'를 이야기하면서 '신의 의지'로 넘어가는 것은 수용의 저항장벽이 존재한다. 

개인적으론 종교를 갖고 있진 않다.  하지만 이 주장에 크게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왜나하면 첫째 기독교가 말하는 '그리스도', '여호와'로써의 신(神)이 아니더라도, 세상엔 '절대적인 신성'이 있을 수 있다는 걸 굳이 부인할 증거도 없다.  둘째, 초월자로서의 신이 아니라도 인간 본성이 '신성-神性'을 갖고 있고 이를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모는 아이에게 절대적이다. 부모의 잘못, 사랑은 아이의 인생에 절대적 선(善)으로,또는 악(惡)으로 작용한다.  부모는 아이에한테 분영히 신(神)으로 작용하는 영역이 있다.  아이가 부모라는 신(神)에게 제대로 사랑받지 못할 때 그 아이 속의 악(惡)은 커져서 인생 전반을 지배한다.

 그렇기에 사람이 사람에게 신(神)이기도, 악마(惡魔)이기도 한다는 것은 실존적으로 사실이다.
 


 또한 이런 가르침은 동양인에겐 낯설지 않다.  불교는 '네 속에 부처가 있다', '네가 부처가 되는 것이다'고 가르친다.

 한편,  얼마전 잠시 접한 '마음 수련원'에서도, '신이 다른데 있지 않고, 네가 바로 신이며, 세상이 바로 천국' '반면 귀신도 네 안에 있고, 그 귀신에게 휘둘릴 때 세상은 지옥'이라고 말한다. 



(마음수련원-두 달 배우다 중단했지만, 그 '버리기' 수련프로그램은 매우 체계적이라 스스로 힘들때 명상하면 도움된다)


7. 무신론에서의 주장과의 접점

물론, 신은 없다.  영혼, 사후는 없다.라고 주장하는 확고한 과학자들도 있다.  난 그 말도 일리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없다'는 논박을 위해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투입할 가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인간은 그저 진화의 산물이며, 세상의 진보는 과학의 발전과 인간 집단 전체의 발달을 통해 좋아지고 있다.' '적어도 세상이 약간씩 나아지고 있는 것에 신의 뜻을 대입하는 것은 우습다.  오히려 신의 뜻을 말하는 집단들이야 말로 세상의 발전을 가로 막고 퇴화시켰다'고 주장한다.

(과학적 무신론의 대중 전파를 위해 가장 열심인 듯 하는 진화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 이 책의 주장이 그렇다)
 

하지만 이런 상이한 주장 속에 접점이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해답처럼 보이는 실마리도 있다.  

인간이 조금씩 발달하고 있다는 것.  '신의 뜻'에 돌리지 않더라도, 인간본연의 노력과 집단 이성을 통해 세상은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것.  하지만 나빠지고 있는 점도 분명히 있고, 그 괴리 속에 인간 속의 善-神性과 惡-惡魔性이 겨루고 있다는 것이야 말로, '무신론'-도킨스가 주장하는 세상의 현재'와 '유신론'-스캇펙이 말하는 세상의 현재로선 분명히 일치하는 것이 아닐까?

즉,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인간 자신이 발달하는가, 타락하는가?  세상이 발달하는가? 타락하는가?는 전적으로 인간의 선택과 행동, 의지에 달려있다.  그것을 작용하게 하는 것이 '신의 뜻'이던, '인간 본성'이던 '집단 이성 속의 선택'이던 간에, 다른 이름을 가진 같은 작용일 것이다.



8. 세상과 나 자신의 욕망 VS 선/진리에의 추구

사람들 각자 자기 삶 속에서 욕망을 추구하고 허우적거린다.  이는 세상으로부터 부추김을 받기도 하지만, 이런 개인의 욕망들의 폭출과 충돌이 세상을 보다 더럽히고 약한 이들을 상처입힌다. 

하지만 이것을 '원래 그럴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치부하고 말 일은 분명히 아니다.  

분명히 인류의 역사는 보다 선한 쪽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발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성별 / 인종 / 민족 / 계급 / 신체 / 연령의 인간 間 강하고 약한 힘의 원리대로 뺏고 뺏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윤리는 이제, '분명히 지키는 게 옳은 것'이라는 인식은 정착되었다  이젠 동물과 환경에도 이기적이어선 안된다는 시선까지 눈이 띄였다.   


(이마저도 전 인류가 공감-비록 행동으로 따르는 것은 별론으로 하더라도-하게 된 것은 인류사에서 극히 최근이다)

욕망을 따르는 것이 본성이라지만, '선/진리에의 추구'도 인간의 본성이기에 서로 업치락 뒷치락하며 여기까지는 온 것이다.


9. 인류 집단의 진로는?

그러나, 마냥 낙관할 것도 아니다.  긴 역사단위에서 시대의 조류는 언제나 역행하고 나빠지는 것도 지극히 있다.

비주류 고고학, SF로 치부받기도 하는 그런 견해에 따르면, 피라미드나 전세계의 유물을 보면, 인류가 발달된 문명을 보유한 것은 지금이 처음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인류의 문명은 지금껏 최소한 1번 이상의 발달 / 절정 / 멸망 / 재생을 반복했다는 것이다. 

(사실 피라미드를 비롯, 전 세계에 흩어진 유적을 보면, '초고대 문명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논리적인듯,,)

(마야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비행기 모형, 동력이 있으면 날 수 있도록 비행역학이 이미 반영되어 있다.  이 모형을 인정하면, 고대에 이미 '비행체'를 다루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런 초고대문명이 멸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성서 등 각종 문헌이 암시하듯 거대한 자연재해(대홍수같은)일까?

그런 자연재해라면 차라리 어쩔수 없는 사항이니깐 그렇다쳐도, 만일 자초한 멸망(전쟁 등)이라면 두려워진다.  
즉 인류가 선하고자 하는 욕구는 파괴욕/정복욕/소유욕에 한번 이상 패배했다는 것이니깐..

그런 상념의 끝에는 역시나 우리가 그런 욕망을 극복해 낼 것이나, 패배할 것인가에 대한 칼 세이건의 단언을 떠올리게 된다.
 


(칼세이건-코스모스)

칼세이건은 그의 명저 '코스모스'에서 외계생명체와의 만남에 대해, '난 외계문명과의 조우를 상상할때 그들이 우리를 정복/파괴하려 왔을 가능성에 대해 공포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동의할 수 없다.  그만한 문명을 가지고 이 곳까지 오는 존재들은 이미 자신 안에 있었을 정복/파괴/지배욕을 극복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욕구를 극복하지 못한 문명은 이미 스스로 파괴, 소멸되었을 것이다.'

그의 말에 공감한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자신의 욕망을 극복하지 못하고 욕망만을 발현할 때 결국 우리는 스스로를 파괴하겠지


10.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단 하나의 해법은 성찰의 노력, 게으름의 극복

거창하게 상념을 넓혔지만, 귀결은 단순하게 수렴된다.

나 개인 역시 세상의 일 부분일 뿐,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단 하나, 나 자신 밖에 없다.

그리고 그 해법 또한 '비방의 특효'가 있는 것도 아니다

끊임없이 성찰하고 노력하는 것이다.

스캇펙은 성찰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고 성장하는 인간의 존재의의지만, 그걸 방해하는 것은 '게으름'이라고 간명하게 정의했다

게으름? 게으름이라니?  너무 나이브(NAIVE)한 거 아니야?  아니다.  깊히 공감한다. 

성찰하고 싶지 않은, 스스로 자문하고 싶지 않은, 절제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행동을 관리하고 싶지 않은 게으름이 바로 만악(萬惡)의 텃밭(田)이다. (스캇펙은 이걸 항상 낮은 상태에서 머무르고 싶은 '엔트로피의 법칙 탓'이라고 정의했다)


(엔트로피-에너지 투입이 없으면 항상 현 상태에서 재빨리 균형-방치-를 이루고 머무르고 싶어한다)


 

11. 이젠 분명히 알겠다.  무슨 치장과 핑계도 필요없고, 내가 성찰하고 책임을 다하고 사는 것만이 해법이라는 것을

긴 우울과 상처에 대한 분명하고 엄격한 가르침을 받은 기분이다.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저 그렇게 게을러질 때 개인의 삶은 병들고 노화한다 (정신적으로 우선).  세상은 눈에 띄게 나빠진다.  선함을 추구하고 노력하려는 사람들에게 게으름은 '세상은 차갑게 압박한다',  나의 게으름이 선한 이들을 상처입히고 있는 것이다.


그래 인정하자.  나의 게으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지금의 내가 싫으면 게으름을 던지고 성찰해야 한다.  그 길이 짧지도 간단하지도 않다.  하지만 가야하는 길이다.  

남에게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책임질 바를 다하는 사람 뿐이다.  

잊지 말자.  가야 할 길은 분명히 있고, 멀리 있되, 가지 않으면 답이 없고, 계속 걸어야 한다는 것을.  

내가 계속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노력은 '내가 계속 가야 한다는 것을 절대 잊지 않고, 계속 걸음 걸이를 닦아 가야 한다는 것을.

그렇기에 이 글의 부제는 '그간 외면해왔던, <이제는 가야 할 길>'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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