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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지리산에 다녀와서

미리해치 2010. 6. 8. 14:30

앞으로의 책, 여행 등 각종 단상에 대해 적고자 하나,

 

일단 예전의 메모들을 올리려 한다.

 

아래 글은 01년 8월 혼자 지리산 종주를 마치고, 친구들과의 동아리 게시판에 올렸던 글을 펌하여 편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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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과 준비

 

2001. 8월, 3박 4일간 지리산을 다녀왔다.


지리산 한 번 안 가본 촌놈이 어디있고, 나 역시 한 두번 지리산에 올라 봤지만,,

이번에 왠지 다른 기분으로 배낭을 싸고, 49킬로를 혼자 걸어봤다.

 

처음 천왕봉을 오른 것은 고등학생때 어떤 무리인지 생각도 안나는 친구들과 법계사쪽으로 올라 당일 천왕봉을 찍고 내려오는 코스였고,

 

두번재는 대학3학년때 산악부 동아리에서 겨울 종주를 떠났으나, 나는 둘째날 부상으로 그냥 노고단에서 내려와버렸다.

 

(산행 며칠전, 그 동아리 선배들과 아침에 농구를 했는데, 성격상 지나치게 터프한 플레이 중, 왼쪽 약지가 새끼손가락쪽으로 약 120도 정도 꺾이는 희안한 염좌상을 당하고, 곧바로 병원에 가서 맞춰넣었으나,

그게 산중에서 붓고 아파온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쉬움이 가득이다. 

 

홀로 내려오던 산길을 왜 그리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르던지, 무언가를 포기하고 떠날 때 느껴지는 희안한 홀가분함과 서러움이 가득한 하산길이었다)

 

 

혼자 종주를 마치지 못했음은 은근히 숙제로 남아있었고, 언젠가는 종주를 해보리라 막연한 생각이었는데, 그때 심리적인 기회가 왔다.

 

당시 나는 절친한 친구와 미묘한 꼬임으로 맘이 꽤 쌓인 상태였고, 혼자서 세상으로부터 배신받은 듯한 청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 청승의 대내외적 표현을 지리산 종주로 천명해보고자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물론, 그당시 두사람 모두의 해결역량 부족으로 11년의 우정이 휘발됨으로써 지금은 안타까울 뿐이나,

 

그때 왜 그리 별거아닌 일로 관계를 단절했는지 모르겠다.  27살에 돌이켜본 20살이 완전 철없는 얘였듯이, 33살인 지금 돌이켜본 27살도 대책없는 사춘기 소년이었다.)


동대문에 가서, 학생때 쓰던 각종 다 떨어진 장비를 신규로 개비하고, 침낭, 코펠, 대용량 수통, 취사장비들을 바리바리 우겨넣다.


(산행중에 이것이 심각한 폐착이었음을 알았으나, 그때의 각오로는 아예 텐트도 가져가서 야숙을 하고 싶었다,,, 실상도 모르고,,)


계획했던 코스는 구례역-화엄사-노고단-임걸령-반야봉-연하천-벽소령-세석평전-촛대봉-장터목-천왕봉-법계사-진주-광주였다.

 

산에서 3일을 잤는데, 사실 내 나이때 청년은 2박에 끝내는게 일반적이라는 걸 알았으나, 무슨 상관인가, 산에서 오래있고 싶었는데

 

 

2. 첫째날

 

이른 아침 서울역에서 구례로 출발, 12시에 구례도착하여 간단히 점심을 사먹고, 노고단행 버스를 타고 올라갔다.

 

사실 3박 코스이면, 화엄사에서부터 걸어올라가야 하는데, 그 길이 그닥 가파른 오르막일뿐 답답하다는 여행기를 보고 해발 1,200미터를 그냥 차를 타고 올라가 버린 것이다.

 

막상 노고단에 올라서니 시간은 3시밖에 안되었는데, 연화천까지 내걷기도 애매하고, 또한 내심의 목적인 '청승 달래기'에 충실하게 근처 이곳저곳을 감상하며, 상념에 젖고자 했으나, 상념은 개뿔, 피할수 없는 지루함에 시달리다 산장에서 잠이 들었다.

 


3. 둘째날

 

노고단에서 출발-임걸령-반야봉을 지나, 연하천을 거쳐, 벽소령에서 짐을 풀었다.

 

지리산 종주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은 심심산중에도 불구, 목마를때쯤 되면 물이나오고, 피곤할때쯤 되면 산장이 나오면서, 편하게 산행을 할 수 있다는게 있는 것 같다.

 

즉, 물과 침낭, 텐트 등 장비를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제대로 신뢰하지 못하고, 물을 비롯, 잔뜩 장비를 지고 다녔으니, 공연히 발걸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노고단에서 반야봉까지 코스는 환상적이었다.

 

깊은 숨과 능선, 아름다운 봉우리를 휘적휘적 지나며, 어제 노고단을 어슬렁거리면서, 느꼈던 부정적인 상념은 사라지고, 순수하게 산에 심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하천이 가까워지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발걸음을 위태롭게 만들고, 급경사의 내리막길에 설치된 로프를 잡고 내려가는데도,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빗속을 걷고 걸으며, 세상 속에 놓고 온 나에 대해 산에 대해 묻는다는 기분으로 생각해봤지만,

넘어지는 왕왕, '산을 만만히 생각하지 말라, 세상 속에서의 고민은 세상속에서 해결할 수 밖에 없다'는 답을 들었을 뿐이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7시쯤 벽소령 산장에 도착하여, 짐을 풀었다.

 

며칠째 지리산속에 아무려나 텐트를 치고, 지내고 있다는 동향 광주의 청년과 소주잔을 길게 기울이다 잠이 들었다.


얼얼한 알콜기에도 억지로 잠을 깨 지리산 절경이라는 벽소월경(벽소령에서 바라보는 달)을 보려했으나, 두둥실 먹구름에 달은 뵈지 않았다.

 

 

4. 셋째날

 

나중에 알고보니 이날 걸었던 벽소령-장터목 코스는 지루함과 급경사, 많은 계단으로 매우 힘든 코스였다.

 

특히 세석평전에 닿기 위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듯한 계단길에서, 공연히 무겁게 싼 배낭, 운동부족으로 인한 컨디션 난조로, 세석평전 직전 왼쪽 무릎에 통증이 가중되더니,

 

세석평전에 올라서서는 그저 한발 걸을때마다 너무 아파, 헉헉거렸다.

 

(이때 연골부상은 꽤나 심했는지, 이후 산행을 길게 할때마다 계속 나를 못살게 군다)

 

세석평전에서 바라보는 절경은 지리산의 특징을 너무 집약시켜 보여주는데, 어데를 둘러봐도 시야가 미치는 곳은 그저, 산, 산, 산일 뿐이다.

 

대한민국에 이렇게나 큰 산이 있다는 사실은 막상 눈으로 보지 않으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왜 지리산이 현대사에서 체제에 반하는 이들을 온건히 담고 있었고, 지금도 무수한 야인들을 품고 있을 수 있는지, 그 넉넉함을 막대한 중량감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세석산장에 도착해서는 그저 녹다운되어, 멍하니 앉아있을수 밖에 없었다.

 

이제 장터목과 천왕봉을 거쳐 하산길이 남았는데, 하루를 더 소요하여 버텨보는가, 아니면 이길로 즉시 하산하는가, 벤치에 누어 아픈 무릎을 주무르며 생각케나 했다.

 

점심을 지어 먹으면서, 서로간에 라면, 김치를 빌리던 옆 산객들의 응원에 힘을 얻어 결국 하루반나절을 더 걷기로 했다.

 

이때 만났던 일행들은 친구끼리 온 나와 동갑내기 여성 2분과 모 종합병원의 원무과 산악회, 그리고 삼촌과 조카 일행이었는데, 나까지 합류, 전혀 상관없는 이들이 PARTY를 이뤄 산행을 계속 하기로 했다.


이 급조된 일행은 이틀동안 쓸데없이 배낭만 무거웠지, 음식은 떨어져가는 나를 위해, 3끼의 식사를 제공하고, 무릎 통증이 심해져, 절뚝거리는 날 여러모로 도와줬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고마운 분들이다.  서울 여성분들은 함께 식사를 했고, 원무과에서 가장 유쾌했던 분과는 간혹 통화하였으나, 지금은 소식끊긴지 오래다.  잘들 계시는지,,,)


 

5. 마지막날

 

마지막 날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일행과 함께 장터목에서부터 천왕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새벽산길은 매우 엄격했다.  급조된 일행이 앞서서 가고 있었으나, 가파른 산길에 안개가 자욱하고, 한발한발이 공연히 아득하게 느껴졌다. 

 

신새벽에 홀로 통천문을 비집고, 천왕봉을 오르면서, 일출 전 어둠과 안개속에서 사람하나 보이지 않는 정겨운 외로움, 바위하나를 올라설때마다, 봉우리 하나하나가 발밑으로 떨어져나가 휙휙 안개속으로 제껴지며, 정말로 천지간, 자욱한 운무속에 눈앞의 구절초 한송이만이 나와 함께 있는 이 세상같지 않는 아득함을 만끽하며 정상에 올랐다.


천왕봉 비석에 기대어 나른한 졸음속에서 마주한 갓 눈을 뜬 수줍은 태양에 4일간의 악전고투가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그리곤 하산하는 아쉬운 시간들, 다시 살아갈 힘을 보충받은 기분 속에서 다음엔 가족들, 평생을 같이 하고 싶은 사람, 아님 언젠가 생길지도 모르는 '나의 가족',,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걸어보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또한 산행에서 무언가를 결심해야 한다는 의무감 속에서 내 주위에 있는 그 좋은 사람들을 좀더 단순하게 보살펴주고 사랑해주어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러나, 역시 산을 내려와선 무릎의 부상이외엔 참 빨리도 잊혀졌다.

지금 남은 건, 그 순간들의 아련한 느낌뿐이다.

 

 

6. 후일담

 

그때의 경험이 준, 각별함에 아내와 2년후 산에 올랐으나, ... 아내는 힘들어 하고, 나도 무릎통증이 역시나 재발해, 이틀만에 내려왔다.

 

언젠가, 다시 그 기회가 누군가와 공유할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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