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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수사경찰의 전범, 가가교이치로의 출사표 <졸업> 본문

읽고 보며 느낀 점

(소설) 수사경찰의 전범, 가가교이치로의 출사표 <졸업>

미리해치 2010. 6. 8. 14:16

0. 추리소설 리뷰를 쓰면서

 

수사경찰로서, 열독하는 추리소설에 대한 리뷰를 쓰고 싶었다.  한편으론, 허접 글질로 명인의 작품에 누를 끼칠까 부끄러움, 갈등도 들었다.

 

게다가 느낀바를 기탄없이 쓰려면 스토리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불가피한데, '시각,음향효과'로 종합구성하는 영화 등과 달리, 글,텍스트만으로 기발한 건축물을 쌓아올리는 추리작가들의 노고를 마찬가지 '글'로서 흠집내는 건 못할 짓이라는 생각,,

 

그럼에도, 통렬한 반전으로 손발이 짜릿한 지적 자극을 주면서도, 인간에 대한 성찰을 놓치지 않는 명품 추리소설에 대한 감사의 염(念)으로 추리소설 감상평을 쓴다

 

 

1. 히가시노 케이고, 그의 분신 가가 형사

 

말이 필요없는 '원츄'의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케이고,,

 

나오키상을 받은 <용의자 x의 헌신>을 비롯, 인간 심리에 대한 추적 <백야행>, 마지막 20페이지동안 3번의 반전으로 만족스런 탈진감을 주는 <백마산장 살인사건>, 추리소설의 범주를 넘어, 아버지와 아들의 불가사이한 교감을 그린 <도키오> 등,,, "과연 이게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글이야?" 할 정도의 질과 양의 소설을 세상을 향해 던지는 작가다.

 

그간 '그간 베풀어주신 은혜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라고 인사드릴 작품이 많지만,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히가시노 케이고가 20년에 걸쳐 키워나가고 있는 가가형사 시리즈 두 권이다.

 

 

2. 가가 쿄이치로, 그의 등장과 성장, 오늘

 

독보 영역을 갖춘 추리작가들은 자신의 인물(페르소나)를 키운다.  코난도일의 '셜록홈즈('아니? 셜록홈즈의 '코난도일'인가?'라고 할 정도로ㅋ), 애거서 크리스티의 '포와로'와 '미스마플' 등

 

히가시노 케이고는 '네리마 경찰서 형사 가가쿄이치로'를 낳았다.

 

그 최신작 '내가 그를 죽였다'가 국내 발간되면서, '가가형사'가 처음 등장하는 '졸업'도 재발간되었다.

 

두 책을 읽으며 가가의 탄생과 20년이 지난 오늘을 대비하며, 여러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3. 가가 쿄이치료 형사, 냉철한 추리와 인간에 대한 애정의 공유

 

책을 소개하는 글마다 주인공 가가는 '냉철한 머리, 뜨거운 심장, 빈틈없이 날카로운 눈으로 범인을 쫓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잃지 않는다'라고 소개된다.

 

기자는 그간 글에서 역시 그 두가지가 수사관이 갖출 '덕목이자 자기 방어를 위한 갑옷'이라 했다.  가가는 그 전형인 셈이다.

 

시오노나나미는 "작가에게 진실한 의미의 창작물은 오직 데뷔작뿐이며, 작가는 그 최초 데뷔작을 일생을 걸쳐 복제(에피고넨)한다"고 했다. 

 

그렇기에, 가가형사의 최근 활약까지 보고 난 기자는 가가의 첫 출사(出師)가 궁금했고, 나름의 해답을 얻었다.

 

 

4. 가가의 최근 활약 <내가 그를 죽였다>

 

 

가가형사 시리즈 최신작 <내가 그를 죽였다>에는, 경박한 영화제작자를 둘러싼 세명의 남녀가 등장하는데, 이들에겐 모두 영화제작자를 죽일 강력한 동기가 있으며, 나름의 방식으로 살인을 기도한다.

 

그들은 자신의 살인모의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이들에게 자신의 살인행위는 누군가를 위한 복수이기도 하며, 누군가를 위한 보호다.  자신이 의미있는 일을 했다는 자부심과 해방감조차 느낀다.

 

그들 각자의 살인모의는 절묘해, 부지불식간에 서로 이용하기도 하고, 아는듯 모르는듯, 그 의도들이 충돌되며 미연에 방지되거나, 겹으로 폭발하기도 한다.

 

(이 행위들을 통해 형법책의 '간접정범'과 '불능미수' 이론에 등장하는 사례들이 생생한 스토리로 재생된다-눈치빠른 법학도들은 이것만으로 대거의 플롯을 알께다)

 

 

가가는 이들의 '자기 딴엔 완벽한 모의'들을 비웃지 않고, 그들이 확신하는 살해의 불가피성을 윽박지르지도 않는다.

 

그저 '진실'을 찾아나갈 뿐이다.  그리고 그 진실이 범인이 살해와 그것을 둘러싸고 겹겹히 둘러친 거짓보다 가치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듯

 

 

5. 경찰이 되기 전 가가 쿄이치로의 이야기 <졸업>

 

 

<졸업>은 청춘을 함께한 대학생남녀 7명 친구집단(가가도 포함된) 속에서 발생하는 살인사건이다.

 

대학생 가가가 세상에 첫 등장하는 이 책에는 이 후 가가시리즈의 전형적 모습이 압축 담겨있다.

 

밀실, 또는 도무지 범행이 이뤄지기 어려운 상황속에서의 살인, 가까운 이들의 숨겨진 갈등과 배신, 그러나 이해할 수 밖에 없는 각자의 시선,

 

가가는, 그들에 대한 우정탓에 용의자(친구들)을 타자화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진실의 파편들을 묵인하기엔 너무 강한 냉정함과 예리한 시선을 갖고 있는 스스로를 인정한다.

 

가가는 친구들 속에 얼기설기 흩어진 범행의 파편들을 찾아 드디어 전체 퍼즐을 맞추고, 마지막 스테이지(탐정이 범인을 밝혔음을 선언하는 순간)에 오르기 전, 스스로 독백한다.

 

'이것이 우리의 졸업의식이라 생각했다. 긴 시간을 들여 언제가는 무너져버릴 나무토막을 쌓아온 것이라면, 그것을 무너뜨렸을 때 비로소 우리가 건너온 한 시대를 완성시킬수 있으리라'

 

기자는 이 말을 이리 읽는다.

 

청춘을 바쳐 무조건적인 우정, 신뢰, 사랑들은 쌓아올려도 결국 언젠가 무너진다. 인간의 마음 속에 욕구와 이기심, 파괴심리, 악의(惡意)가 깃들어 있고, 고의든, 아니면 아주 옅은 미필적 과실, 방조든,, 그것들과 결합해버리면, 그간의 우정과 신뢰를 송두리채 파괴한다.

 

하지만, 그 나무더미가 언젠가 무너져진대도, 그간 쌓아올림이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사람은, 세상의 '악의', '나약', '이기', '탐욕', '폭력'에 직면한다 해도, '밝고 맑고 따뜻한 모습'을 믿고 살았던 자신을 긍정할때, 그 그릇인 인간본인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게 된다.

 

그점을 깨닫고 선언하는 것이 가가의 졸업의식이었고, 그 후 이어지는 가가의 형사활약의 바탕에 흔들림없이 깔려있는 태도는 바로, 가가의 졸업의식에서 완성된다.

 

 

6. 수사경찰의 시대정신을 실현하는 가가 교이치로

 

니체 왈, '초인은 시대정신(시대의지)을 투영하는 자이다', 즉 빛의 속도로 나르는 슈퍼맨만이 초인이 아니라, 시대가, 시대인이 원하는 의지를 반영하여 실현하는 자가 초인이다. 

 

범죄를 밝히되, 범죄인마저도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추리를 완성하고, 인간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는 초인, 가가형사, 앞으로도 이 불민한 후학에게 많은 가르침을 베풀어주세요^^

 

 

 

뱀발 하나. 추리소설을 보면 항상 상황이 폐쇄적으로 짜여져 있어(밀실살인 등)  '대체 어떻게 발생한 범죄지?', '우와 답을 못찾겠다', 막막함을 느낀다. 

 

추리소설의 작가들은, 범죄상황을 설정하며, 쉽게 추정할 수 있는 가설들을 객관식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작중 상황은 항상 그 객관식 답안이 정답일리 없다.

 

하지만 정답은 객관식 보기의 범주 밖에 있다.  또한 그 답은,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기발한 것이되, 논리추론 가능한 개연성이 있는 것이여야 한다.

 

가가를 비롯, 추리소설 속의 명탐정들은 항상 그 과정을 예리하게 짚어가는데, 그 풀이과정을 기자 식대로 정리하면, 대부분, '모든 상황을 상정하는 열린 상상력과, 각 가정상황들을 수집정보에 따라 빼내나가는 소거절차의 반복'이겠다.

 

그리고 그 소거법의 핵심은 모든 기발한 상황도 가능하다는 상상력과 창의력에 있다

 

화석같이 굳은 머리로 수사현장에서 삽질만 했던 기자로선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경외할 수 밖에 없는 능력이시다 (물론 탐정이야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런 상황을 설정해내는 작가야 말로 더더욱)

 

 

뱀발 둘.  좋은 추리소설을 만나는 것은 기쁘지만, 대부분 일본,미국의 소설인 게 아쉽다

 

왜 우리나라엔 '명 추리소설'을 찾기 어려울까?  이유야 많겠지, 출판을 비롯, 문화산업의 전반적 위축, 특히 대중소설에 대한  경제적,문화적 대우도 지대할 것이다.  하지만, 기자는 다른 방향도 쳐다보게 된다.

 

우리 나라는, 소설의 주인공으로 묘사할만한 현실 속 '멋진 수사경찰, 멋진 탐정'이 드물하는 것.

 

어딘가에 많이 계시겠지, 하지만 작가의 집필소재가 될만큼, 독자가 자연스럽게 감정이입할만큼 멋진 수사경찰이 존재한다는 것은 일반 독자의 입장에선 웬지 설득력이 없다. 

 

그렇게 냉정하고 뛰어나고 예리하되, 인간에 대한 애정과 통찰력을 갖춘 수사경찰이 우리 곁에 함께 하고 있고, 그런 인물이 모델이 되어, 추리소설이 쓰여진다는 것, 우리나라 독자들이 많이 수긍할까?

 

아쉽다.  사실은 참 슬픈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경찰수사관 개개인의 자질미흡 탓이라고 말하기 싫다.

 

우리나라 형사소송법상 수사경찰에게 '수사의 권한과 책임'이 아니라, '보조자'로서 결정적일때마다, '누군가의 전횡'에 흔들리고, 자신의 일에 자긍심을 가질 수 없는 구조라는 것,,

 

그래서 유능한 경찰이 수사를 열심히 하고, 수사부서에 근무하는 경찰이 열심히 자기개발을, 인격도야 하는 분위기가 되기 어렵게 만들어놓은 제도가 씁쓸하다.

 

기자의 시야가 미치는 곳에서도 존경할만큼 뛰어난 능력과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수사현장을 떠나고 있는 것, 그래서 계속 현장이 메말라가는 것,, 그리고 그런 현실이기에, 우리나라에선 생생함과 기발함을 겸비한 추리소설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

 

독자로서 아쉬움을 넘어서, 기자의 직업관 전반을 슬프게 하는 오늘의 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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