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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야할 길 2 - 끝나지 않은 여행> 삶은 복잡하고 평온은 환상이다. 성장하고 참아내며 답을 찾는 노력만이 진리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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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야할 길 2 - 끝나지 않은 여행> 삶은 복잡하고 평온은 환상이다. 성장하고 참아내며 답을 찾는 노력만이 진리다.

미리해치 2011. 6. 1. 23:12


1. 스캇펙의 <아직도 가야할 길> 두번째 이야기 - 끝나지 않은 여행

스캇펙은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절제', '균형', '책임', '진실'에 대한 이야기와 '고통'에 대한 인정과 참다운 감내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그 두번째 책으로 <끝나지 않은 여행>을 냈다

아마 그동안 그는 본격적인 기독교인으로서 변신하고, 개방적 이념을 갖춘 종교/이념 공동체 활성화 운동도 적극적으로 주도했던 것 같다.

두번째 책에는 그런 20년의 경험과 더 깊어진 시각이 생각의 여백을 주는 서술로서 집필되어 있다
(1권은 대단히 엄격한 깨달음을 사례와 같이 반복하며 주입식 시각 변화를 강행하는 느낌이었지만, 2권에서는  보다 느긋하고 은유적인 글체를 구사한다)
 

아래 글은 그의 글을 일부 인용하고, 전체적으로 요약 재구성한 내용이다.


2. 위기없는 평온한 삶, 근원적 해법을 통한 즉시적 문제해결은 '인간'과 '세상'에겐 환상이다.

(예수는 평온한 이였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에게 정신건강이란, '위기를 얼마나 잘 피했는지'가 아니다.  위기를 얼마나 일찍 만나 다음번 위기로 최대한 잘 넘어갈 수 있는지, 그리고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위기를 자기 안에 담을수 있는지에 따라 판단된다.
 

예수가 과연 마음의 평화를 가진 이였을까?  복음서에서 예수는 지속적으로 좌절을 겪었다. "제가 당신께 뭐라고 말해야 하나이까?  몇번이나 제가 말해야 하나이까? 어떻게 해야 당신께 도달할 수 있겠나이까?"  

예수의 이런 좌절에서 볼때 깨달은 이에게도 '평온'은 허상에 불과하다. 갈등, 고독, 분노를 정면으로 딛고 일어나려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신성(神性)닿으려는 의지와 노력만이 있을 뿐이다.



3. 복잡한 삶의 수용과 역설적인 과제에의 도전 속에서 치열한 중용(中用)
 
 

(양 쪽으로 언제나 흔들리기에 중용은 오히려 치열한 적극행위다)


책의 서두에 스캇펙은 <아직도 가야할 길>을 다시 읽어보니 그 내용이 틀리지는 않지만, 지나치게 거침없는 스스로의 입담'에 당황했다'고 서술한다.

즉 그렇게 거침없이 '그렇게 하면 해결된다'고 단언하기엔 역시나 모든 문제는 보다 더 미묘하고, 보다 더 복잡한 면이 있다는 것이겠지

'원래 삶은 단순하지 않으며, 복잡하다'는 것, 그렇기에 끊임없이 복잡한 삶에 대한 해답 찾기를 지속해야 한다

'한번에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혁명(革命)'은 매력적이지만, 실은 허위다.  파괴된 구체제 질서를 대체할 신질서가 자리잡기 전에 모든 것이 다시 한꺼번에 붕괴되기 십상이다.  개혁은 혁명보다 지난하기에 고통스럽지만 실은 그것이 바르다.  

그리고 진정한 개혁이란  추구해야 할 역설적인 가치를 통합하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과정이다.  그것이고통스럽지만 완전함을 지향하는 개혁의 길이다.

그렇듯 사회 체제도, 개인의 삶도 역설적인 주제를 담대히 걸어놓고 통합하려고 노력하는 시도를 끊임없이 계속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중도'(中道)를 자처하는 것은 얼핏 생각되는 것 처럼 '만연한 일이 아니다.  진정한 '중용'이란그저 '형세를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쪽으로도 미혹되지 아니하려는 긴장감을 유지'한 채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도록 치열하게 노력하는 능동적 자세이다.


 


4. 성장과 끊임없는 호기심의 추구
 

(인간을 성장하게 하는 것은 끊이지 않는 호기심이다)
 
'해논 것 없이 이 나이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하지 말자.   나의 성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성장은 줄곧 진행중이다.

노화는 성장을 드러내놓고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누구나 심리적인 장애로서 노화는 피해갈 수 있다.  더 탐구하고 즐기려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안다고 오만하지 마라.  그럴수록 성장을 멈춘다.  그러기위해 유용한 질문법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내가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착각은 게으름과 두려움때문에 무지 속에 머물고 싶어한다. 

그렇기에 정신건강이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실상에 충실하려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실상이 우리를 아무리 불편하게 만들더라도!

성숙하지 못한 이는 '무관심'하고, 건강한 사람은 미스터리에 호기심을 가진다. 신비는 마시면 마실수록 더 공급되므로 키워나가기 더없이 좋다.   성숙한 사람은 '교리'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라, 과학자 같은 탐험가이다.  노화는 멈출수 있다.  정신적으로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은 탐험성과 호기심을 더더욱 키워가는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에서 '마음의 가난한'이란 '혼란스러운'이다.  사람은 혼란할수록 그 해결 과정에서 배움을 얻기 때문이다.


5.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과 '자부심의 유지'와의 차이
 

(나 자신을 진정으로 소중하게 여기자)



성공한 사람들은 진정한 자기애를 가지고 있다.  이는 자기에 대한 배려,존중, 책임, 이해를 함축한 말이다.

그러나 이 '자기에 대한 존중'은 '자부심의 유지'과 분명히 차이가 난다.  자신의 죄에 대해 엄격히 훈육하는 것은 진정한 자기애이나,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와 세상을 속일때 오히려 자기를 기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선 이따끔 자부심을 제처놓고 엄격해야 한다)

'자기에 대한 자부심'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은 그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기만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한 증거를 발견할 때, 교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짓된 사람'들은 얼마든지 스스로 거짓말을 하며 자신의 결점/악행을 외면한다.  그들은 그렇게 드러난 증거를 자기 교정에 쓰지 않고 오히려 엄청난 애너지를 들어 증거를 없애고 타인에게 변호/강요하면서 자신의 병든 자아를 보호하려 한다(!!!)

 

또한 크고 작은 사고가 잦은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자기애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기자신을 귀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의식이 무의식 부분에서 작기 때문에


6. 누구나 문제는 있다.  문제를 성숙하게 객관화 시켜 인식하자.  해결은 '자기 몫'이다. 
 


('괜찮다'고? 아니, '안 괜찮지만, 괜찮다'가 옳다)


'나도 괜찮고 당신도 괜찮다'라는 말은 잘못이다.  문제가 없는 자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런 문제를 외면할 때 문제는 심각해진다.  옳은 표현은 '나도 괜찮지 않고, 당신도 괜찮지 않지만 그래도 괜찮다'일것이다.

사람은 문제가 있을 때, '문제' 자체 보다는 '문제 속의 나'를 우선하게 되어 허둥되거나 불안감을 느끼거나 더 깊이 가라앉아버린다.

선악과를 따먹고, 즉 인간은 '자의식'이라는 것을 갖게 되면서, 자신을 분열된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부끄러움과 위축, 이건 세상과 내가 연결된 것이라는 것을 읽고, 자기 자신에 더 많이 매어있는 사람에게 '자의식'은 모든 행동과 객관화된 사고를 제악하는 장애요인이다.
 

술을 한잔 마시면 자의식이나 부끄러움을 줄이는데 도움이 될까?  대개는 치러야할 대가가 훨씬 큰 법이다.
 
 

무언가를 망설이는 불안감이 괴롭힐 때 펙의 해결방법은 3단계이다. ①나의 이 과로움은 실존적인가?  신경증적인가?  이 고통은 나라는 존재를 강화하는가 아니면 제한하는가?  ②만일 걱정이나 자의식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③그렇다면 '그랬으면 하는 방식'으로 행동하자.  그리고, '그런 것처럼 행동'하자. 그런 척 허세를 부리자.  (불안감이 없는 척, 당당한 척,)  ==> 이는 즉, '해결해야 할 일'과 '나 자신의 자의식'을 분리하는 방식이다.  

문제 속의 '나'를 버리자.  내가 아닌 객관적 존재가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생각하자.  그러나 그 노력과 거기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노력 여부의 책임이다.

(미성숙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서로 둘러 앉아 인생이 자신의 욕구를 채워지지 못한다고 불평만 하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은 인생에서 자기 욕구를 채우는 것은 자기 책임-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의식'과 '객관화'의 노력속에서 좀 더 성숙하게 된다.  이는 바로 의식 때문에 고통을 겪지만 반면 의식 때문에 구원을 얻는 과정이기도 하다.  구원이란 점차 의식 (무의식의 교훈을 받아들이는 훌륭한 교사로서의 의식)을 갖게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6. 인생의 의미, 훈련과 계속되는 탐색과 준비
 

(사막으로 들어가자.  훈련하고 준비하며 탐색하면 답은 분명 온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신성을 가르치려고 계획된 것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을 위해서는 고통을 대하는 태도와 의식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 얼마간의 위로는 필요하다.  그러나 성급한 조치-근본적이지 않은, 엇나가는- 오히려 망가뜨리게 된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 이런 저런 시도를 하는 것보다, 그저 '바라보고 참는 법'이 중요하다. 
(이는 남의 고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설픈 위로보다는 차라리 함께 있는 것, 들어주는 것, 같이 참는 것이 절실하다.)


고통속에서 끊임없이 '삶의 의미와 나의 존재의 진실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진실은 내가 그것을 원한다는 것이고 내가 치러야 할 대가는 끊임없이 계속 계속 계속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렇게 의식의 사막으로 걸어들어가면 모래를 보지만, 더 깊이 걸어들어가면 오아시스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자신의 궁극적인 운명을 채우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 그렇게 깨닫게 될 궁극의 자세는 '내가 얼마나 중요하고 아름답고 바람직한지.  그래서 세상에 나가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대하는' 것의 체득일 것이다. 

언젠가 스스로의 운명과 세상에의 역할에 대해 그렇게 깨닫고 체득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내가 할일은 계속 준비하는 것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과제를 대신 해줄 수 없다.  스스로의 노력만이 유일한 답이다.

(성경에 예수를 기다리며, 그 분을 알아보기 위해 등불에 넣을 기름을 준비한 여인이 그렇지 않은 여인에게 기름을 나눠주지 않은 것에 대해 예수님이 꾸짖지 않고 칭찬한 것은 바로 '준비는 나눌수 없기 때문'이다.)  



7.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해법, 진정한 공동체
 

(서로 연결된, 그리고 서로 구별하지 않은 공동체가 천국이다)


알콜의존증치유협회(AA)는 아주 의미있는 영성 성장 모임이다.  치유와 정신적 성숙, 그리고 기독교리에 입각한 영성에의 자극을 기반으로 하고, 특히 공동체 정신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공동체 정신은 아주 귀중하다.  그러나 위기가 지나가면 금새 사라진다.  AA는 그런 '위기'를 함께 공동체정신과 해결하려 한다.  천국이란 공동체와 가장 가까운 동류이며, 천국을 발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동체를 통하는 것이라 믿는다.


반면 지옥에 대한 기독교 우화에서는 천국에 초대받은 많은 사람이 '누구에게도 차별없고 특권없는 공동체'에 실망하고 스스로 지옥으로 다시 떠나버린다.  (지옥문은 넓게 열려 있다.  천국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스스로 찾아가는 곳이다.)

천국과 지옥을 그렇게 구별짓는 특색 중 하나는 무엇일까?  구획화, 물화, 개인화, 무엇이라 이름붙이든, 전체 중에 나를 단절해버리고 구별하여 한계지어버리는 것이다. 

사악하다(diabolic)라는 말은 '갈라놓다', '분리하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diaballein'에서 나왔다.

베트남전쟁에서 펜타곤의 병기부, 전략부 그리고 WH가 각자 책임을 떠넘기는 사례를 보듯, 구획화현상은 제도의 정신을 파편화, 희석화하여 조직을 약화시키고 정신을 사라지게 한다.  이는 개인에게도 마찬가지다.

완전함(integrity)는 '통합하다'라는 말과 같은 어원에서 유래한다.  완전함을 염두에 둘때 어떤 현상에 대해 '빠뜨린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어떤 수준에 이르면 우리 개개인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음을 조만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진정한 천국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연계되어 있는 공동체이며, 지옥이라는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런 관심도 배려도 없이 자기것만 누리려는 개인화된 특권화된 사회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바라는 것을 다 줄수 없어도 좋다.  다만 자신을 타인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받는다.  예컨대 누군가(예-부보,자식 간)의 요청에 최종적으로 그가 바라는 요청을 들어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문제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고민해줬다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마도 트위터/페이스북 등 쇼설 네트웤의 급격한 확장은 이런 '공동체'에 속해있고, 연결되어 있고, 싶은,, 그리고 자신이 믿을 수 있는 누군가를 선택하여 '온라인'이라는 안전한 공간 속에서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싶다는 인간의 욕구가 반영된 것일 것이다.



8. 죄악과 비판, 그리고 용서

(용서, 눈감아주는 것이 아니라, 직시하고도 명확히 용서하는 것이다) 

공동체라는 사회 속에서 다른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해 자신도 비판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사람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판단하라.  '죄없는 자만이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는 성경어구는 누구도 누구에게 비판해선 안된다는 금지만은 아닐 것이다.  타인을 비판할 때 자신도 비판받을 각오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옳을 것이다. 

공동체 속에서 나의 비판, 나의 숙고에 과연 무엇이 빠졌는가,, 생각해보면, 어느 단계에 와서 어떤 것도 '나의 책임'이 일정부분 있음을 인식하게 되리라
 

그렇기에 용서란 '죄를 지은자'와 '죄를 당한자' 사이에서 서로가 서로를 직시하고 대가를 받는 것이다.

누구도 '악'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울수는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은 있다.  그렇기에 악(惡)을 눈감아 주는 것이 아니다.  악(惡)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당신의 행위는 잘못이예요.  당신은 내게 죄를 저질렀어요.  난 그걸 알고 있지만, 난 용서할 것입니다'  이런 용서는 어렵고, 힘들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 필요하다.  


스스로에 대한 용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잘못을 명백히 인정하고 죗값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스스로 용서할 수 있다.


9. 창조이든 진화이든 발전과 선악(善惡)의 선택

(인간의 창조, 신께서 보기가 좋았기에 인간을 창조하였다면, 인간 창조는 '선함'의 발달과정인가?) 

성경의 '신이 모든 것을 보기가 너무 좋았다.  그리고 인간을 창조했다'는 표현은 '창조성'이 선을 행하려는 인간의 본능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꿔 생각해보면 한편, 진화론 역시 인간의 성선설에 기인한, 또는 성선적 발전 본능과 기인한 측면이 있다. 

인간, 인류는 성선설, 상호부조, 보살핌의 흔적 속에서 공동체를 통한 약자의 보호를 통해 진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신께서 만든 '천국을 위한 신병훈련소'라고 생각한다.  쓸모없는 행위란 아무것도 없다.  신께선 다양성을 좋아하신다.

이는 진화론을 채택할 때도 마찬가지다.  자연은 다양한 변종간의 경쟁을 통해 우월한 종이 '자연선택, 자연 낙오'되게끔 한다. 

인간집단 속에서도 과연 '이기적이기만 한 악인(惡人)의 개체'이 자연 낙오할지, '균형과 배려를 갖춘 선인(善人)의 개체들이 자연 낙오할지, 우리는 지금은 알 수 없다.  신의 뜻이라하더라도 혹은 자연의 힘이라 하더라도 그 판결 때까지 우리 삶은 그저 극히 '순간'에 불과하니깐.


10. 그리고,,, 사이비종교 혹은 건강하지 않은 집단의 10가지 특성

펙박사는 사이비종교의 10가지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①카리스마를 지닌 한명의 지도자를 숭배 ②숭배받는 내부 집단 ③비밀스러운 관리 ④재정은폐 ⑤스스로 생각지 않고 의존하는 추종자들 ⑥천편일률 ⑦특수한 언어(외부 세계와 의사소통 상실) 
교조적인 교리 ⑨이단(적극적이고 격렬하게 하느님에 대한 관계를 부정)  ⑩속박된 하나님(하나님을 독점한다고 평가)

이는 종교집단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비슷하게 입고, 비슷하게 보이고 비슷하게 행동하도록 엄청난 압박을 행사하는 IBM도 그런 요소를 갖고 있다)

경찰과 같은 대조직, 혹은 정부집단, 대기업 어디든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진정한 의미의 선한 공동체는 아니며 사이비 집단이리라

  또한, 성행위에 대한 생각해볼만한 이야기

 성행위, 오르가즘은 신성과 연결된 측면이 있다.  이를 천박하게 볼 것도 아니며 오히려 존중하고 진지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그러나 '성관계' 자체는 관계를 망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성적인 대상이 되는 순간 우리는 상대를 이용하려는 성향이 강해진다.  은밀하게, 또는 공공연하게 교묘하고 이기적인 방식으로 이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모든 욕구는 정돈될 때가 있을 것이다.

모든 최고의 관계는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곤 한다.  전도서에 이르길 "천하의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을 이룰 때가 있나니", "끌어안을 때가 있고 끌어안을 일을 멀리해야 할 때가 있나니"

  그러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의 의지를 단력하되 또 한편 그 의지가 폭주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기를 주장할 수 있는 대단한 힘을 가진 것이므로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이다.  약한 의지를 지닌 것은 뒤뜰에 어린 당나귀를 데려다놓은 것이다.  그는 아무 힘도 없다.  하지만 강한 당나귀는 힘도 세어 일도 잘하지만, 반면 밭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인간의 의지/감정도 이와 같다.



11. 신은 우리를 포획하려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포위망속에 있을지언정, 붙잡히진 않았다.

 완전한 기독교인이 된 펙은  '정신건강'과 '영성'을 추구하면서, '신의 뜻'을 실감했고, 신은 우리를 뒤쫓고 있고, 우리는 힘차게 달려야만 벗어날 수 있다.  신에게 잡혔을 때, 그것은 '기쁘기 그지 없는 일'을 아니다.  그러나 신은 믿기 어려울만큼 우리를 사랑하며 아무리 멀리 도망가도 우리를 소유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난 '섭리'는 있을지언정, 아직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한다.  특히 그것이 어느 종교의 신일지 역시도 

달라이 라마 역시도 '세계의 모든 중요한 종교는, 사랑이라는 유사한 사상과 영적인 실천을 통해 인류를 이롭게 한다는 똑같은 목표와 추종자들을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든다는 똑같은 취지를 갖고 있다'고 하지 않았다.


12. 그렇기에 자연과 초자연 속에서 탐구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치유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근대 이후 자연적 지식은 과학의 영역이고, 초자연적 지식은 종교의 영역으로 결코 부딪히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철학은 초라해지고 우리의 '세계관'도 왜소해졌다.  종교(religio)라는 어원 자체가 '연결'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본질은 사물세계 뒤에 숨겨진 질서와 조화의 연결을 추구하려는 세계관임에도

심리치료사가 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스스로를 치유하는 노력이다.  이 노력에 있어 최근 몇년간은 정통 정신과의학보다 목회상담자, 경영컨설턴트, 조직 산업 심리학자들이 더욱 기여했다.

꼭 정신의학이 아니어도 좋다.  자신을 치유하는 것은 '통섭'적 추구에서 가능하다.  그리고 그 노력은 결국 스스로를 치유하고, 세상을 좀더 낫게 하는데 아주 작은, 그러나 한 개인의 삶으로선 의미있는 생을 만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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