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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야기

이병무 님 (낮은계단)

미리해치 2010. 6. 8. 14:29

참으로 존경스러운 분이다.

 

80년대 엄혹한 시절에 '경찰 중립화선언'을 주도해,

 

굉장히 어려운 고충을 겪으셨다. 

 

그런데도 지금도 경찰과 사회의 옳은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참여하는 일에 열정을 갖고 계시다

 

 

나보다 12년이나 연상의 선배이신데도,

 

전혀 그 '나이로 인한 경직된 권위'가 전혀 없으시고,

 

언제나 '나도 정말 제대로 살아야지' 가르침을 주고 계신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6월의 시위대·경찰·넥타이부대…20년만 조우 ‘항쟁의 추억’
[6월 항쟁 20돌] 끝나지 않은 6월
1부-1987년, 그후 20년 ① 다시 만난 6월의 사람들
한겨레 전종휘 기자
? (맨위) 1987년 6월10일 서울 명동 입구에서 시위에 나선 권영태(점선 안)씨가 경찰이 최루탄을 터뜨리자 황급히 피하고 있다. 고대신문사 제공 / (가운데) 전국이 시위로 들끓던 87년 6월8일께 전경부대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이병무(가운데)씨가 경기 수원의 한 고등학교 앞에서 잠시 시간을 내 소대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씨는 이틀 뒤 명동성당 농성장에 투입된 뒤 15일 저녁에는 다시 부산으로 출동했다. 이병무씨 제공 / (맨 아래) 당시 고려대 3학년이던 조동기(점선 안)씨가 1987년 6월18일 서울 종로5가에서 찻길에 드러누워 시위를 벌이고 있다. 고대신문사 제공
함께 광장에 선 세사람
은퇴한 70대 권영태씨
경찰청 팀장 이병무씨
논술학원 운영 조동기씨

사진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① 1987년 6월10일 서울 명동 입구에서 시위에 나선 권영태(점선 안)씨가 경찰이 최루탄을 터뜨리자 황급히 피하고 있다. 고대신문사 제공
② 전국이 시위로 들끓던 87년 6월8일께 전경부대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이병무(가운데)씨가 경기 수원의 한 고등학교 앞에서 잠시 시간을 내 소대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씨는 이틀 뒤 명동성당 농성장에 투입된 뒤 15일 저녁에는 다시 부산으로 출동했다. 이병무씨 제공
③ 당시 고려대 3학년이던 조동기(점선 안)씨가 1987년 6월18일 서울 종로5가에서 찻길에 드러누워 시위를 벌이고 있다. 고대신문사 제공

 

 

한낮을 달군 이른 더위가 잠시 수그러든 지난 3일 해거름 명동성당 앞, 나이도 차림새도 제각각인 세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고 있다. 행인들이 힐끔힐끔 눈길을 던진다. 세 사람은 1시간 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난생처음 만나 을지로를 걸어 이곳 명동성당에 막 도착했다. 20년 전 따로 또 같이 경험했던 6월의 그 공간을 다시 돌아보는 발걸음이다.

“6월 항쟁 당시 성당 안에서는 수녀님과 신부님들도 앞에 나와 시위하고 저 옆에서는 전경들에게 꽃을 꽂아주는 분들이 있었죠. 제발 최루탄 그만 쏘라고. 당시 시위대가 외친 구호 가운데 이건 아직도 귓전을 맴도네요.” 현직 경찰인 이병무(45)씨의 웃음 띤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민주경찰 동참하라, 훌라훌라♬”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 줄에 접어든 권영태씨도, 그 아들뻘 되는 조동기(42)씨도 고개를 끄덕인다. 가락이 귀에 익다.

 

 

‘민주경찰 동참하라 훌라훌라’ 귓전 생생

 

조씨가 “당시 명동성당은 해방구였어요. 아름다운 모습들이었죠”라며 운을 띄웠다. 그러자 이씨는 한술 더 뜬다. “전국이 해방구였죠. 예전엔 시위는 소수가 하고, 다수는 말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때만큼은 다수가 행동했기 때문에 항쟁이라는 말로 정당성을 획득한 것 아닐까요?”

“그런데 조 선생은 그때 명동성당 쪽은 안 들어왔나요?” 이씨가 물었다. 대답을 하기 위해선 기억을 더듬어야 한다.

 

■ 1987년 6월10일, 타는 목마름으로 = 대통령을 체육관 선거로 계속 뽑겠다는 정권의 발표에 성난 민심은 전날 연세대생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 소식에 군불 땐 팥죽처럼 들끓었다. 이날 국민대회에 참가한 고려대 국어교육학과 3학년 조동기 학생도 다른 시위대와 함께 명동성당에 들어왔다. 총학생회 문화부원이기도 한 조씨는 “성당을 중심으로 외곽에서 계속 (경찰과) 싸웠다”고 회상한다.

 
 

성당 앞에선 전경부대 소대장 이병무 경위가 시위대에 맞서고 있었다. 시위가 시위대의 몫이라면 경비는 경찰의 임무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경찰이 시위대에 밀리면 자칫 군대가 투입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최악의 상황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지탱하는 힘이 됐다. 그날 밤 ‘땡전뉴스’(9시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대통령은 “좌경용공 세력이 명동성당을 점거하고 있다”고까지 말한 터였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보름간 ‘출근투쟁’

 

비슷한 시각 성당 근처에선 넥타이를 맨 권영태씨가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고 있었다. 서울, 인천 등지에서 세무 공무원을 하다 그만두고 집에서 잠시 쉬고 있던 그는 6월10일부터 꼬박 보름 동안 관악구 봉천동 집에서 을지로까지 지하철을 타고 ‘출근 투쟁’을 벌였다. 누가 권씨에게 그러라고 시키지도 않았다. 하지만 정의롭지 못한 권력은 “근본이 야당 체질”인 그를 가만히 집안에 있게 하지 않았다.

학생으로, 경찰로, 시민으로 서로 다른 위치에 있던 이들 세 사람은 당시 ‘현장’에서 한 번쯤 스치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에는 없다. 그래도 무슨 상관이랴. 역사가 토해낸 용암 줄기에 모두 뜨겁게 녹아 있었던 걸.

 

 

 

 

? 1987년 당시 대학생이었던 조동기(왼쪽부터)씨, 평범한 시민으로 6월 항쟁에 적극 참여했던 권영태씨, 전투경찰 소대장으로 명동성당 앞을 지켰던 이병무씨가 지난 3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당시 겪었던 상황을 얘기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조씨는 지난달에 졸업 뒤 처음으로 연극 무대에 섰다. 대학 극회 선후배 5명과 함께 고려대 4·18기념관 대극장에서 <대머리 여가수>를 공연한 것이다. 그는 “새벽 5시까지 연습하기도 했는데, 첫 무대치고는 괜찮았다”며 웃었다.

경찰대 1기 출신인 이병무씨는 6월 항쟁 이듬해인 88년 1월 ‘경찰 중립화 선언’을 주도했다. 이씨는 당시 각 언론사에 보낸 ‘경찰 발전과 민주화를 위한 참회’라는 제목의 글에서 “국가 전체와 사회 각 분야가 민주화의 열기로 가득 차 있고 발전과 번영의 내일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는데, 유독 우리 경찰은 갈수록 멍만 들어간다”며 경찰이 정권안보가 아닌 민생치안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에게 “언제까지 경찰을 정치의 시녀, 정권의 도구로 이용하시겠습니까”라고 공개적으로 물어 파문을 던졌다. 이씨는 20년 동안 두 계급이 올라 현재 경찰청 총무과에서 단체지원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대안 너도나도 찾아야”

 

6월 항쟁 이전 건축자재 판매사업에 손을 댔다 재산을 몽땅 날리고 사글셋방에 살던 권영태씨는 항쟁 직후부터 아파트 재건축 사무소에서 열심히 일한 덕에 95년 다시 집을 마련했다. 지난해 7월부터는 용돈이라도 벌어볼 요량으로 인근 초등학교에서 야간 경비 일을 시작했지만 올 3월에 해고당했다. 2년 전 갑자기 찾아온 뇌출혈로 몸 왼쪽이 다소 불편한데, 용역회사는 그걸 못미더워했다. 그 사이 자식 셋을 모두 출가시킨 조씨는 요즘 바둑채널을 시청하고 관악산을 오르며 조용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역사에 대한 타고난 관심은 어쩌지 못해 요즘도 책 찾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 그리고 20년, 그때 그 사람 = 짠 ∼. “자, 한잔합시다!” 명동성당을 나온 세 사람은 그날 저녁 인사동 한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불고기를 젓가락으로 집던 권씨는 “그땐 자장면 한 그릇으로 요기해 가며 시위에 참가했는데, 혼자 돌아다니지 않고 조직에 가담해 움직였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며 웃었다

 

 

세 사람은 항쟁 이후 20년 동안 진행된 정치적, 절차적 민주주의의 성과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경제 부문의 민주화를 두고서는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양극화의 문제가 대두되는 가운데 신자유주의가 물밀듯 들어와 있다. 신자유주의만큼 많은 자유를 누리는 체제도 없지만, 이는 가진 사람은 즐길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즐길 수 없는 자유다. 항쟁 이후 사회가 생계투쟁, 조합운동에 머무른 게 우리의 수준이고 한계였다.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너도나도 찾아야 한다. 현재의 양극화가 극대화하면 또다른 모순이 나타날 것이고 그 결과는 너무 비극적일 것이다. 자본주의의 높은 생산력은 그것대로 가져가되, 분배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조동기씨)

“역사적으로 큰 시대상황을 경험한 세대가 일정 부분 시대를 끌어가야 건강한 사회가 된다. 평탄히 산 세대가 한 시대를 끌고 가기엔 부족하다. 6월 항쟁의 범위를 넓힌다면, 현장에서 부딪친 사람들이 (시대를) 끌어가는 역할을 제대로 할 때에야 비로소 항쟁의 의미가 역사 속에 물들어 그 본분을 다하는 게 아닌가 싶다.”(이병무씨)

어느새 첫 만남의 어색함을 떨쳐버린 이들의 대화는 밤이 이슥하도록 이어졌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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