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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식) 본문

읽고 보며 느낀 점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식)

미리해치 2018. 12. 16. 13:50

개인주의자 선언 / 문유식

 

규범의 상징, 판사라는 존재가, 자신은 개인주의자라고 선언한다.

학력고사 전국 수석에 빛나는 학생 시절이 실은 눈치와 벼락치기, 암기에 따른 꼼수라고 고백한다.

서울대 법대, 치열한 탐구와 고뇌에 대한 얘기는 그저 어쩌다보니 휘말린 에피소드처럼 겸손하게 말하고, 오히려 시티헌터, 오렌지로드 같은 일본 만화에 탐닉한 만화방 죽돌이 시절을 말한다.

 

문유식 님의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책에는 개인, 한 사람으로서 솔직한 관조,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읽고 느낀 이야기들이 채워져 있다.

 

 

개인 주의자에 대한 당위성

인간의 삶은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다.

생의 온갖 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피를 나눈 가족과, 이상을 공유하는 동료와 나눌수있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홀로 자신의 삶을 짊어져야 하는 존재이다.

 

개인주의(individualism)이라는 단어는 한국 사회에서 그리 좋은 인상을 갖지 못하다.

이기적인, 자기 것만 챙기는, 정없는, 깍쟁이 라는 이미지가 떠오를수도 있다.

 

공동체의 규율과 작동을 위한 규범에 대해 가장 근본적인 판단을 해야 하는 판사가 개인주의자라고 선언하다니, 공동체, 의리, 협력, 이타심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질 수 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근대를 열어간 것은, 계급을 부정하고, 보편적 인권을 추구한 시민들이 개별적인 자존 인식이였다. 근대의 산물인 시민법에 복무하는 법관이 개인주의의 가치를 설파하는 것은 지당하다.

 

씁쓸하게 돌이켜 보면, 우리의 법이 생존을 주장하는 개인들에게 얼마나 인색했던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모를 공동체, 국가의 존엄을 앞세워 살아있는 사람의 생명과 권익에 대해 폭압할 때를 우리는 그리 어색하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80년대, 70년대는 물론, 더 거슬러 올라가 3.1 운동 조차도 1919년 당시의 (일본) 법은 공공의 평온을 해치는 소요죄의 유죄를 판시했다. (언젠가 임무 때문에 소요죄 판례를 검색하는데 19193.1절에 대한 소요죄 판례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내가 하는 일을 새삼 생각해본 적 있다)

 

가족같은 회사라는 말이, 따뜻함과 보살핌이 아니라, 착취와 침해를 상징하는 희화화된 표현이 된지 오래되었다. 서로 돕자는 말, 서로의 경계를 허물자는 말은 갑이 을에게 요구할 때는 더 자연스럽게 발휘된다.

 

서로를 개인으로 존중하면 그 거리가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그 만큼 상대가 나랑 전혀 다른, 절대 섞일 수 없는 또 다른 우주임을 인정하고 그를 사랑하던, 그와 협력하던, 그와 경쟁하던, 모든 관계를 건강하게 추구할 수 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랑과 협업, 혹은 미움 마저도, 상대와 나에 대한 뒤섞임이 가득하다. 그렇게 경계가 흐려서 섞이면, 실은 그렇게 탐닉하는 사랑이든, 함께 추구하는 이상이든, 처절한 미움 조차도 사실은 그 사람의 진짜 존재가 아니라, ‘내 마음 속에 만든, 내 식으로 투사한 주관적인 상과의 자기 놀음이기 쉽다.

 

 

개인주의가 되는 용기

그럼에도 우리는 개인주의라는 말에 경계감, 불편함을 갖고 있다.

평생과 같이 가는 가족,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은 자신의 또 다른 정체성이 된다. 누구의 아들, 아빠, 남편, ㅇㅇ조직 ㅇㅇ부서 ㅇㅇ책임자, ㅇㅇ전문가 등의 직함과 경력, 이를 둘러싼 사람들이 라는 존재를 이루고, 이것을 빼앗으면 내게 남은 무언가는 없어질 듯 허약한 불안감들을 가지고 산다.

 

그 불안감 때문에 오히려 더 헌신한다고 하며, 더 충성한다고 하지만, 대부분 그 결과는 내 자신의 허약함에서 비롯한 과잉이기에, 그 헌신과 충성이 과연 평온한 성과와 만족으로 이어지지도 못한다.

 

그렇기에 더 좀 더 거리를 둬야 한다. 나를 둘러싼, 그러나 나로 착각하기 쉬운 관계와 이상들로부터 나는 누구이고, 무엇일까생각하며 거리를 둬야 한다. 그렇게 거리를 두기 위한 지렛대는 무엇일까? 내 생각에는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인간 존재 1법칙이다. ‘나는 죽는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극단적으로 진실한 운명이다. 이 운명을 가만히 생각하면, 나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진지할 수 있다.

 

 

개인주의자 문유식이 바라본 세상

 

그런 진지함이 세상을 엄숙하게만 살아가게 하는 것은 아니다. 속독 학원에서 어른들을 속여먹은 독서 천재의 경험도 헛된 욕망들이 충돌하는 가운데서도 일견 유쾌하다. 사람이 서로를 죽이는 범죄에 대해 심판자로 임하면서도, 세상은 따뜻해지고 있다는 신념이 왜 옳은지 설명해준다. 또 그렇게 따뜻해지고 있는 세상은 인류가 동물성에서 조금씩 절제하고 문명화하는 과정이기에, 우리는 지금처럼 서로 더 참고 더 존중해줘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다. ‘선비질은 그렇기에 더 존중받아야 할 태도인 것이다.

개인주의자라는 역설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개인으로서 삶을 안온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의존해야 한다. 인간은 서로에게 최고의 자원이다.

 

앞으로 세상을 바꿀 키는 인간 세상의 작동 원리를 근본적으로 바꿀 혁신 기술일 것이다. 앞으로 세상이 과학기술과 자본주의의 양극화에서 어찌 변할지 모르지만, 법치주의와 11표제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가 최후의 보루일 것이다. 선악과 명암이 교차될 혼돈 속에서 좋은 세상을 나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담대한 낙관성이다. ‘미래가 잘 될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어딘가에 조용히 도착해있는 미래를 찾아내 발굴하고 작동시키겠다는 자신감이 그 근원이다. (‘냉소적으로 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어. 담대하게 낙관주의자가 되라구’, Anyone can be cinycal, Dare to be an optimist)

또 그 자신감은 작은 것이라도 부담없이 책임져서 변화시켜보겠다는 자세들의 조합이다. 오히려 극단적인 반대와 찬성, 일도 양단적인 판단, ‘근본적 해결이 필요하다는 계도, ‘모두 다 총체적 불량이라는 전개는 오히려 ‘so what?’, ‘정말로 추구할 해법을 탐색하기 어렵게 만든다. 정말 해결을 위해서는 변할 수 있는 작은 요소들, 천천히 전체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지렛대의 디딤돌을 찾아야 한다. 한편 사실이지만, 쓸모없는 (true but useless)’가 아니라, 실제 도움이 되는 작은 행동들을 모아가는 설계자들의 노력은 뭔가 나아지게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진 이에게도 좋은 사례이다. 선지자 보다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이미 가지고 있는 스스로에게 그럴 수 있게 말을 걸어주는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사람 간에 서로를 지켜주기

 

세상은 안전해지고, 더 좋은 세상이 되어가는가?, 직관적 우려에도 불구하고, 실은 여러 지표 상 인간은 서로를 더 지켜주고, 덜 폭력적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자연스럽게 온 것이 아니다. 시대의 부조리에 대한 불편함이 바로 다시 실은 더 좋아지고 있는 시대로 발전을 계속 견인하는 에너지가 되었다. 선한 사람, 선함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응원하는 것이 그 힘이다. 진보적이라는 것은 자칫, ‘쿨하다는 관념으로 이어지고, 이런 전개들이 정당하게 형성된 권위를 무시할 수 있는 권리로 오해되선 안된다. 옳음에 대한 권위의 존중도 중요하다. 진보가 권위를 무시하고, 예의를 가벼히 하면 통합을 위한 외연을 넓힐 수 없기 때문이다. 통합이라는 것이 개인에 대한 억압이 아니라, 개개인을 존중하지만, 전체를 발전시키는 성숙함이어야 한다. 그 사회의 성숙 정도는 위기의 순간에 대중과의 소통, 전문가의 용기, 정치지도자의 결단 등을 통해 형성된 통합적 합의, 권위를 통해 드러낸다.

 

우리는 과거의 단일 민족의 통합적 관념이 벗어나는 시기이다. 마을, 촌락, 국가는커녕 가족도 통합적 권위로서 흐려져 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합의된 아니라면, 우리를 안심하게 할 규범은 어느 넓이와 두께로 세울 수 있을까? 우리는 것을 잘 세우기 전에 적대적 유희에 젖어버리고 있는걸까? 홍어, 김치녀, 한남, 좌빨 등 혐오 유희가 그런 조짐일까?

 

개인주의자들이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각자가 스스로를 존중하면서, 마찬가지로 서로를 존중할 애정, 선의, 도덕, 이타심, 협동, 희생, 의무의 준수와 권익의 보호라는 규범들이 같이 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미래를 낙관적으로 함께 만들어 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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